▲ 박강수 대전문화재단 대표 |
아무렇게나 잘라진 못 생긴 나무토막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신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 조각가는 온갖 정성을 쏟아 기어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튿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노 조각가의 집을 비추고 있을 때 이미 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노 조각가는 그 새 작품을 자기집 현관 앞 난간에 멋있게 장식했다. 마치 훨훨 날 듯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새였다.
몇 주가 지났다. 그 집 앞을 지나가던 토막나무의 주인이 우연히 새 조각품을 보게되었다. 새 조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노 조각가를 찾아가서 값은 고하간에 새 조각품을 팔라고 졸라댔다. 노 조각가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비싼 값으로 그 새 조각품을 팔았다.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작품을 사 품에 안고 농장 주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새 작품이 쓰임 받은 것이다. 노 조각가는 그 농장주인이 주고간 두툼한 새 조각품 값을 싱글벙글 세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지. 겉만 보고 아나?
마일즈 먼로(Myles Munroe)가 쓴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세상에는 쓸모 없는 토막나무에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각가와 같은 멘토를 잘 만나 쓸모있게 창조된 사람들도 있다. 창조란 이렇듯 무서운 힘을 갖는다. 지식정보사회가 되면서 부쩍 창의력과 리더십이란 말이 늘어났다. 농장주인처럼 토막나무를 쓸모없는 뗄감으로 본 것도 조각가의 눈에는 쓸모있게 보인다. 누구를 만나 자기의 잠재능력이 계발되느냐가 길이다.
요즘 대학들이 앞다투어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입학생을 찾고 있다. 초창기라 걱정된다. 인간의 머리와 가슴 속에 녹아있는 지력을 알아내고 계량화해서 쓰임 받는 사람과 쓰임 받지 못하는 자로 나눈다. 쉬운일이 아니다.
미국의 대학은 입학사정의 척도가 섬세하고 다양하다. 매우 우수한 학생일지라도 의과대학에 입학하고자하면 외적충분조건인 성적과 봉사 뿐만 아니라 내적인 필요충분조건까지 우수해야한다. 말하자면 입학 그 자체보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과연 쓸만한 의사가 될 것인지를 더 따진다. 즉, 졸업 후 쓰임 받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가 입학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입학사정의 잣대는 아무리 봉사의 양이 많아도 의학도가 되려는 사람이 가령 헌혈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불합격된다. 지력과 인성을 고르게 따진다.
쓰임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도 그 사람의 창의력과 멘토가 누구냐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 요즘은 더욱 누구를 만나느냐가 출세의 갈림길이 된다. 무엇보다도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릇이 있다. 깨진 그릇, 더러운 그릇, 깨끗한 그릇이 있다. 세가지 그릇 중에 쓰임 받는 그릇은 물을것도 없이 깨끗한 그릇이다. 잡티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그릇이 언제나 쓰임 받기 마련이다. 이렇듯이 앞으로 쓰임 받는 사람은 깨끗해야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깨끗해야 한다. 바야흐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순순한 사람이 쓰임 받는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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