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1. 은허와 갑골문화
2. 은허의 유물들
3. 세계유산 등재 과정
4. 백제유적의 현주소와 과제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정도로 몰라보게 세상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작한 중국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 은허유적지는 10년 만에 허허벌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바뀌어 격세지감을 실감케 한다. 한자의 모체가 되는 갑골문자가 발견되지 않았으면 이곳은 아직도 풀과 나무만 듬성듬성한 촌락이었을 것이다.
이에 본보는 세계문화유산 위원과 고고학자, 부여군문화재보존센터 연구원들과 함께 지난 1928년 첫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은허유적지를 찾아 중국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의 변화와 발굴 후 유적의 보존과 관리 상태를 살펴본다. 또 이를 통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공주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 전략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 한자의 모체가 되는 갑골 15만편 4500여개 한자가 발견된 중국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 은허유적지는 지난 2006년 7월 13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10년 만에 눈부신 발전을 거듭, 관광객이 연평균 25만명으로과거10만 명에 비해 월등히 증가했으며, 입장권 수입만도 세계문화유산 신청 이전의 200만위안(한화 약 3억4000만원)에서 800만위안(한화 약 13억6000만원)으로 4배 이상 늘었다. |
# 중국 고대문화 중 가장 찬란한 은상문화
중국 고대문화 가운데 가장 찬란한 문화가 은상(殷商)문화다.
기원전 17세기경부터 기원전 11세기경까지 중국 황하(黃河) 중하류 지역에서 고대 국가를 형성했던 은상(殷商)이란 나라는 전기에는 황하 중류에 있었다. 이를 상(商)이라 하고 후기에 황하하류에 있던 시기를 은(殷)이라고 한다.
은나라는 기원전 1300년 전후로부터 1000년경까지 대략 300년 가까이 존재했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하남성 안양현(현재의 안양시) 소둔촌 은허에서 갑골(甲骨)이 발견됨으로써 은나라가 역사상 실존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은허는 은나라의 옛 도읍터를 말하는데 19대로 알려진 반경(盤庚)이 은으로 천도한 후부터 제신(帝辛)에 이르기까지 8대 12왕 273년간 은대 도성의 중심지로 왕실의 종묘와 궁실자리이기도 했지만 기원전 11세기 중엽 주(周)가 은을 멸한 후 은의 수도는 점차 폐허가 되었다.
# 中 고고학의 요람이자 갑골문의 고향
황하문명은 황하를 중심으로 남의 하남과 북의 하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흔히 중국대륙의 중심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중원(中原)으로 불린다.
은허유적지에서 답사단을 안내한 위에짠웨이(岳占偉)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안양분소 연구원은 “은허는 중국 고고학의 요람이자 갑골문의 고향”이라며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0년 동안 15차례에 걸쳐 이뤄진 대대적인 발굴결과 15만 편의 갑골문에서 4500여개의 한자가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은허유적은 동서 약 6㎞, 남북 약 6㎞, 전체면적 36㎢의 비교적 큰 규모로 왕릉구역과 궁전종묘(宮殿宗廟)구역으로 구분되며 왕릉제사갱(祭祀坑), 가족묘지군, 갑골갱(甲骨坑), 옥기와 골기(骨器)를 제조하는 작방(作坊) 등 많은 유적이 확인돼 갑골문과 고고발굴에 의해 증명된 중국의 첫 고대 도성유지다.
또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한 최대의 청동솥인 사모무정(司母戊鼎) 출토유구와 고고발견 중 최초의 축력차(畜力車)로 확인된 차마갱(車馬坑) 등 중요유구는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시설을 설치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복골과 청동기, 옥기류 등의 유물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도록 유적 내 박물관을 두고 있다.
갑골은 거북 배편의 껍데기인 구갑(龜甲)과 사슴이나 소의 어깨뼈인 견갑(肩胛)을 이용해 점(占)을 치는 복골(卜骨)을 가리키는데 이 두 종류의 뼈에서 뒷글자를 한자씩 따와서 이를 갑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갑골은 청나라 말기인 1899년 국자감(國子監) 제주(祭主 오늘날의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이 말라리아에 걸려 한약을 달여 먹기 위해 북경의 한 한약방에서 구입한 용골(龍骨)이라는 뼈에 이상한 문자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석문을 연구하던 그는 이 글자가 고대의 문자임을 직감하고 약방으로 사람을 보내 용골을 모두 사들이고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수소문해 하남에서 출토되었음을 알게 됐으며 나중에 이것이 은나라의 갑골문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은허 유적지인 소둔촌 농민들은 당시 농사도중 갑골이 많이 발견될 때마다 이를 한방약재로 내다팔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출토된 갑골만도 총 15만 편이며 청동기 5000여 점, 세계 최대인 875㎏짜리 청동솥, 2600여개가 넘는 옥기 등이 은허 유적에서 나왔다.
# 세계유산 등재 후 입장권 수입 4배 증가
▲ 은허유적지에서 발굴된 갑골 |
취재팀과 동행한 최정필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세종대 교수)은 “10여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눈에 보이는 유물유적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는데 최근 수년간 눈부신 변화를 가져왔다”면서 “중국 뿐 아니라 인류 문명사의 혁명과도 같은 갑골문의 발견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함께 보존하고 후손에 전수해야할 유산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땅 속 깊은 토광묘에서 아무리 찬란한 유물이 나왔어도 땅 위로 드러나는 게 없는 현실 속에서 유적지 내에 박물관을 짓고 왕릉과 갑골저장갱을 복원 전시할 뿐 아니라 충분한 교육시설물까지 만드는 중국인들의 과감함에 놀랐다”며 “이는 가시적으로 보여 지는 문화재가 적은 백제왕도 공주와 부여 백제역사지구의 유적정비 복원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참고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하남성=임연희 기자 lyh3056@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