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임순 금호중 교사 |
지난해 3월, '대전보다 가까운 학교'로 부임한 날부터 마주친 녀석들은 뜻밖에도 야생동물들 같았다. 줄잡아 열 명도 넘는 녀석들이 종이 울려도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한 마디로 책과는 담을 쌓은 '공부의 적(敵)'들! 아이들은 국어수업을 통해 꿈과 에너지를 주고 싶다는 첫인사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반마다 한두 명의 짱들이 본능적인 기 싸움을 걸어왔다. 교실 안의 술렁임에 “너희들 중 일본 놈 있어?”라고 일갈했다. 순식간에 잠잠해진 아이들에게 “어떻게 우리 대한민국 교실이 이 모양이야? 이러고도 너희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외칠 자격이 있어? 중국에게 고구려 역사를 안 뺏길 자신 있어?
지금 미국에선 최초의 흑인대통령 오바마가, 누구보다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인물이 되었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중1때 영어 공부에 빠진 덕분에 전 세계를 사로잡았는데, 수업시작도 제대로 못하는 너희는 대체 뭐야? 무식해서 나라를 또 뺏기고 싶어? 요즘은 땅을 빼앗는 전쟁이 아니라 무역 전쟁, 정보 전쟁, 그리고 문화 전쟁이야! 경제 식민지, 문화 식민지!”라고 기염을 토했다.
마침 내 손엔 첫 수업 오리엔테이션 자료와 오바마 이야기란 책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남자의 미소에 반해버린 눈치였다. 또한 장차 수업퀴즈 상품인 빌 게이츠, 오프라 윈프리 등 21세기를 움직인 사람들이란 또 다른 책들에도. 그렇게 아이들의 숨겨진 독서본능을 자극하는 일은 즐거웠고, 점차 아이들은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과 친숙해진 5월, 매주 금요일 방과후수업 대신 EBS '공부의 달인'이라는 마법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전국의 공부 비법 고수들만을 찾아내어 만든 30분짜리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마음만 먹으면 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라는 신념과 몰입의 희열을 그들에게 선사했다.
6월 어느 날 공개수업, 아이들은 청어처럼 싱싱하게 펄떡였다. '지사의 길 시인의 길' 이육사의 생애, 의미 있는 모둠별 주제활동을 펼치며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창의적이었다. 특히 뮤지컬 배우가 꿈인 양태영 군의 천부적인 익살과 압도하는 재치라니!
10월 국가수준평가, 22명 학력미도달자 중 단 5명을 제외하고 모두 구제. 오, '한 아이도 뒤처지지 않게 (No Child Left Behind!)',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커다란 느낌표가 솟구쳤다. 또, '느티나무 어울마당 축제' 한 마당 손바닥 시화전, 도서교환전 풍경. 운영위원회와 어머니회의 도서구입비 200만 원 지원, 평소 독서를 좋아하지 않던 녀석들이 더 먼저 좋은 책을 고르려고 안달했고, 헌 책 두 권에 새 책 한 권 교환은 전교생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12월 숨죽여 '시를 발견하는 마음'에 빠지던, 시인의 친필사인회에 긴 줄을 서던, 교과서 시인과의 가슴 벅찬 만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정호승 시인 초청 특강. 혼불문학관, 토지문학관을 찾아 17년 간 10권의 대하소설 혼불을 남긴 최명희와 26년 간 21권의 토지를 쓴 박경리의 문학혼 앞에서 삶의 비의를 엿보며 숙연해지던 어느 쉴토의 '문학기행'….
오늘 그 아이들이 새로운 둥지를 향해 겨울 하늘을 날아갔다. 그 중 한 마리 새가 이런 노래를 남기고 갔다. “교단에서 선생님은 꼭 타오르는 불꽃 같으셨어요. 그 불꽃이 저희를 항상 일깨웠어요.”
나는 내일도 지식보다 소중한 상상력의 불꽃을 일으키며 아이들과 웃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