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산 대전대 교수.시인·평론가 |
하지만 간판과 레테르가 내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방송사 출연 기록을 과시하는 화려한 간판만 믿고 들어갔던 식당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음식 때문에 낭패를 당한 적도 더러 있고 레테르만 보고 산 옷의 품질에 실망했던 적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성품과 능력을 어찌 간판과 레테르에 해당하는 외형적 표식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외형적 표식으로만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게 되면 인간은 사라지고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만 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 간판과 레테르를 너무도 중시 여긴다. 누군가 새 옷을 입고 나타나면 그 옷의 디자인이나 색깔이 얼마나 그 사람과 잘 어울리는가를 평가하기 전에 먼저 옷을 까뒤집어 레테르부터 확인한다. 그리고는 역시 고급 브렌드여서 좋아 보인다고 말한다. TV 방송을 타고 '맛집'이라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면 그 집은 그날로 대박이 난다. 손님이 몰려들어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도 사람들은 유명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감사하게 먹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더 문제는 외형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려는 노력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이런 외형적 표식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시를 쓰고 시평을 하는 필자가 주로 활동하는 시단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시인이 쓴 시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문이나 잡지로 등단했는지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는지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한다. 그야말로 시가 시인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스펙이 그 시인이 쓴 시의 가치를 말해준다.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이런 간판과 레테르 문화는,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문화적 역량이 천박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옷의 디자인을 평가할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옷에 붙어 있는 레테르를 확인해야 하고, 시를 평가할 예술적 소양이 부족하기에 그 시를 쓴 시인의 간판에 의존하게 된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사회를 들여다보는 지혜가 없기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의 진정한 인간적 가치보다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자격증 등 외형적 표식에만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문화적 역량을 갖추는 것은 주체적 인간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간판과 레테르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존해서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유명한 맛집에서 음식을 먹고 비싼 브렌드의 옷을 사 입어도 결코 고급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감성과 사고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주체적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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