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벗어나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준비했던 이 시기는 1883년 인천항 개항과 맞물려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물밀 듯 밀려오면서 이의 영향을 받은 개화사상과 전통적인 동학사상, 위정척사운동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혼미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의 외세가 한반도 침략의 야심을 키우면서 우리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국면에 접어 든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대내외의 혼란속에서도 근대화를 향한 우리 민족의 다양한 노력은 계속됐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기통신의 도입을 통한 통신의 일대 전기를 맞은 것이다.
1885년 9월 28일, 최초의 전신시설이 한성과 인천간에 개통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은 비로소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곧이어 서울과 의주, 서울과 부산 등 전국적으로 사통팔달의 선로가 구축되면서 주요도시가 전신시설로 연결돼 새로운 기간통신수단으로 정착돼 갔다.
특히 서울과 의주를 연결했던 서로전신선이 청나라의 그것과 연결되면서 이곳을 거쳐 유럽까지 연락이 가능한 국제전신업무로까지 확대되는 등 큰 발전을 하게 됐다.
그러나 전화사업의 경우 전신시설에 비해 발전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1882년, 중국에서 최초로 전래한 후 궁중에 시험적으로 설치됐으며 1896년에 이르러서야 자석식 전용 교환기가 궁중의 내부 전용으로 설치됐다.
그리고 1902년에는 서울과 인천간 전화업무가 개시됨으로써 드디어 일반인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최초 5 가입자로 시작한 우리나라의 초창기 전화사업은 1905년 일제의 통신권 강탈로 인해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아픔을 겪으면서 좌초됐다.
이후에도 한일 통신협정에 의해 통신주권을 강탈당하는 등 고난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 동안의 통신사 역시 아픔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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