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논설위원실을 옮기는 9년차의 수평이동 끝에 우연찮게 만난 것이 벽에 걸린 가재 그림이었다. 비딱비딱 옆걸음하는 게와 뒷걸음치는 가재의 진척 없음, 저 한심한 갑각류. 한시를 푸니 자화상 같아 '아니올시다'이다. '돌을 등에 업고 모래를 뚫고 스스로 집을 지어/ 푸른 산 한 줄기 찬 샘 속에 살지언정/ 강호의 만 리 파도를 원치 않는다.' 댓바람에 못을 빼려다 괜스럽게 이 시가 눈에 밟힌다.
이상은 그림보다 시 때문에 빛 낡은 액자가 수명을 늘린 경위서다. 책으로 치면 W. H. 베일리의 『액자보다 그림이 좋다』보다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가 더 좋은 모양새랄까. 액자에서 마음과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창을 발견해서는 아니다. 그리고 이쯤에서, 꿇어앉아 글 읽는 학자를 '궤(?)'라고 풍자하던 것에 공감한다. '궤'는 게의 발을 가르켜 동물에 비긴 의수화(擬獸化)이기도 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말이 있다. 말 되지 않음, 어이없음. 진짜 뜻은 언어에 의존하면 절대의 진리를 십분 드러낼 수 없음이다. 그런 헤맴이 꼭 싫지는 않다. 게으름의 전당, '齋堂'(나재당) 서재 편액이 그래서 마음에 닿았으리라. 세상사 술 밖에 있으니 술도 안 마시고, 신선이 내 안에 있어 바람 쐬고 달 볼 일 없다…. 사실은 정반대다. 유유자적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또 하나의 액자와 맞닥뜨렸다. 칼국수집에 서각되어 걸린 '侖庭'(윤정) 두 글자다. 용헌 이윤용 글씨다. 둥글둥글한 정원? 생각의 뜰? 주인 이름이라 한다. '오시리스'가 계단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 '아라비아'가 침묵 속을 걷는 사람이듯, 이름이 깊다. 공주 공산성 영은사 현판을 쓴 일강(一江) 전병택의 내 이름 작품에 손발이 오그라들어봐서인지 살뜰한 그 자부심이 부럽다. 개인의 바람은 이름이 고평가되지도 저평가되지도 않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통 이상 '생산적'이라 간주한다.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의 눈이 아니어도 90% 이상은 그렇다. 내가 평균보다 우월하다는 소위 '워비곤 호수 효과' 때문에 더하다. 남 앞에서의 승진 탈락 불평, 복권 벼락에 대한 불만은 불리한 진술이다. 남들도 그들 자신을 그리 생각하니까.
긍정심은 좋다. 남들은 버린 밥으로 잉어를 낚는데, 누군들 푸덕푸덕 꼬리치는 잉어를 낚기 싫을까. 긍정심의 최대 해악은 “난 일등!”을 외친다고 일등이 안 된다는 점. 의식이 무의식 속 이미지나 신념과 불합치할 때, 동기부여는 좌절을 부풀린다.
가재는 앞으로도 가고, 게도 레코드판에서 뺑뺑이하다 놓으면 평형감각을 잃은 채 전진한다. 가재걸음이 전진처럼 보이는 고 마이클 잭슨의 월면보행(문워크) 재주가 없을 바엔 발전 없는 게걸음, 퇴보인 가재걸음은 삼갈 일이다. 뒷날 제자리걸음일지라도 지금 걸음이 앞을 향한다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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