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길 충남대 경영학과 교수 |
세종시는 몇 년 동안에 걸쳐 국민적 동의와 여야 합의를 거쳐 시행하고 있는 국책사업이다. 이미 5조원 이상 투입되었고 전체 공정의 4분의 1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사업을 현 정부는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라는 관변조직을 만들어 불과 두 달 만에 개조한 것이 현재의 수정안이다. 말로는 진정성이 담긴 약속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수정안 마련 과정을 보면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고 담겨진 내용도 이미 원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시 수정안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진정성과 실천가능성에 짙은 의문을 갖게 된다.
행정도시를 백지화할 수 있다면, 또한 수도권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면 현 정부는 어떤 대안이라도 제시하여 보자는 검은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서울 중심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대안도 국면을 호도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수정안이 통과되고 나면 정부는 적당한 시점에서 손을 떼거나 차기 정부로 미룰 것이고, 세종시는 국민의 혈세를 퍼부어 재벌기업과 일부 사립대학에 엄청난 특혜를 주는 지방도시의 하나로 전락할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확장하여 보자. 만일 다음 대통령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세종시 수정안을 백지화하고 이곳에 다른 성격의 도시를 만든다고 할 때 무슨 명분을 갖고 이를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행정도시 건설을 백지화하는 것은 정치적 신의와 정책의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도 지탄받아 마땅하다.
지난 정부에서 여야합의로 특별법까지 만들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단순히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백지화시켜 버리는 것은 정치 도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진정 국가의 백년대계를 고민할 수 있겠으며, 어느 국민이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뒤집는 것은 단순히 행정도시 건설이라는 하나의 사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할 것이며,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이 넘쳐나는 정치풍토가 될 것이다. “대통령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라는 변명이 거짓을 가리고 자기합리화를 위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은 도청했다는 사실 보다도 이를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더욱 큰 이유였다. 그만큼 대통령의 도덕성은 엄중한 것이고, 그런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대통령이 공적인 약속을 쉽게 뒤집는 것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가중시키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약속을 뒤집고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에 죄를 짓는 행위이다. 이것이 거짓말로 인한 신뢰의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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