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은 남산아래 묵적골에 살고 있었는데 굶주림에 지친 아내의 호통에 떠밀려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속으로 나온다. 다짜고짜 장안 최고의 갑부 변씨를 찾아가 만금을 빌리고 그걸 밑천 삼아 국내외 무역으로 백만냥을 벌어들인다.
▲ 황선애 한밭도서관 사서 |
옛 선조들은 이렇게 “진짜 공부”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스승을 찾아 다니며 하는 공부라….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닌가. 선조들에게서 배우는 공부 그래서 고미숙은 고전읽기를 제안한다.
고전읽기.
독서가 공부다. 그러면 아무 책이나 읽으면 되는가?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랑 똑같다는 뜻이고 이런 건 독서의 범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 왜 고전인가.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이어야 하고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겨있고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고전읽기! 힘들다. 그래서 또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암송과 구술이다.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연구실 토요서당에 초중고생들이 함께 모여 논어와 고전시가 현대시 한편씩을 암송하는데 이상의 오감도를 선택했다고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길이 적당하오)/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분이 모였오'
듣고 보니 전적으로 동의가 되는 부분이다. 구술 능력이란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라 삶과 인간,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의 표현인데 누구든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는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 자기의 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를 바란다.
이게 바로 구술이 리더십으로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식검색과 프레젠테이션이 횡행하는 시대에 네티즌들의 글쓰기나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전체적 맥락 보다는 일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감정의 적나라한 노출이 일반적이 패턴인데 이는 소통보다는 독백에 더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의 세계, 그리고 인문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험준한 고봉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지구력과 열정이 필요하고 당연히 혼자서는 어렵다고 고미숙도,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의 이권우 작가도 말한다. 운동, 영화, 콘서트 다들 친구들하고 가는데 참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건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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