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사랑에 취했을 때, 실연을 당하고 좌절했을 때 그려지는 장면도 그간 로맨틱코미디에서 익히 봐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500일의 썸머'는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도 어떻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정말 색다른, 썩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재기발랄하게 증명한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 천국과 지옥을 무수히 오간다. 톰과 썸머가 벤치에 앉아 손을 포개는 488일에서 시작해, 첫눈에 반하는 1일로,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톰이 '정신 줄' 놓은 290일로 뒤죽박죽 점프한다. 썸머와 헤어져 지옥에 빠진 톰이 집에서 접시를 마구 깨는 장면과 썸머와 처음 만난 날의 황홀한 기억이 교차되고, 썸머와 다퉜던 날의 기억과 둘이 손잡고 가구 매장을 거닐던 추억이 교차된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니던가. 좋았던 순간이 떠올라 배시시 웃다가도 최악의 순간이 떠올라 분노하는, 아, 죽일 놈의 사랑. '500일의 썸머'는 시간을 뒤섞어 사랑은 결코 기승전결의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라고 들려준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가치를 발하는 영화다.
세밀한 감정 묘사를 위해 다양한 기법도 동원된다. 썸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톰이 사람들과 흥겹게 춤을 추는 뮤지컬 신이 등장하고, 썸머에게 절망하면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이 지우개로 지워지는 삽화처럼 사라진다. 톰이 썸머와 헤어졌다 우연히 재회하고 그녀가 연 파티에 갔을 때 화면을 이분할한 방식도 유쾌하다. 그의 기대와 실제 현실을 동시 상영하는 이 장면은 비슷한 순간을 경험해본 이들의 가슴 속을 예리하게 파고들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고통을 마음 속 깊이 호소해온다. 첫 사랑을 기억하는 남자, 실연의 아픔을 겪어본 남자라면 다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받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연인들이 물음, “대체 우린 뭐가 문제였을까?”하는. 영화 후반부, 썸머가 그 답을 들려주니 귀 기울여볼 만하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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