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 디자이너 고운은 아홉 살 소라와 단둘이 산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 가장 역할까지 하느라 엄마 노릇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소라는 바깥일에 매달리던 엄마가 자신에게 부쩍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하다. 소라는 엄마 품에서 잠들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눈치 채는데.
‘웨딩드레스’는 시한부 삶임을 밝히고 시작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면 오늘 무얼 해야 할까. 권형진 감독의 선택은 ‘역할 바꾸기’다. 엄마는 철없는 아이가 되고, 아이는 엄마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딸의 소풍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엄마가 처음으로 김밥을 싸 바닷가로 딸을 이끌 때, 불결하다며 친구랑 물도 나눠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가진 딸이 엄마를 위해 친구가 먹던 우유를 먹으며 친구에게 화해를 청할 때,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엄마의 일터, 웨딩숍에 따라간 딸. 결혼식에서조차 웨딩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없다는 엄마의 말에 엄마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힌다. 자신은 턱시도를 입고는 엄마 손을 붙잡고 춤을 춘다.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려는 속 깊은 딸.
까다로운 식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딸. 자신이 없을 날을 생각하며 엄마는 걱정이 된 나머지 역정을 낸다. “누가 이런 짓 받아준대! 누가!” 딸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 “엄마가 오래 살아서 다 받아주면 되잖아!” 이런 장면들에선 아무리 돌석 같은 사내라고 해도 눈물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웨딩드레스’의 미덕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임에도 시종 훈훈한 온기를 잃지 않는다는 거다. 죽음이라는 현실에만 매달리지 않고 현실에서 공감할 만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훈훈하다. 송윤아와 김향기의 연기는 감정이 살아 숨 쉰다.
김향기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초딩의 마음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낸다. 숨을 거둔 엄마를 뒤로 하고 혼잣말을 하는 후반부 장면에선 성인보다 훨씬 풍부한 결을 보여준다. 손수건을 꼭 챙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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