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은 중국에 있는 산으로 높이로 보면 우리의 한라산이나 덕유산보다도 낮다. 하지만 평원에 우뚝 솟은 바위산인 까닭에 태산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누리게 된 것 같다. 태산은 역대 중국에서 황제를 자처한 자들이 봉선의식을 거행한 산이기도 했다.
진시황제도 태산에 올랐고 한나라 무제도 태산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모모하는 우리네 잘 알려진 인사들도 태산을 올랐다는 소문이 있다. 한때 대통령을 꿈꾸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 시조 속의 태산이 꼭 중국에 있는 태산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높고 큰 산을 일컫는 보통의 의미로 보아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시조의 작자 양사언이 산천유람을 즐겨했고 특히 회양군수 시절 인근에 있는 금강산을 여러 번 올랐다고 하는데, 그 점으로 보면 금강산 같은 큰 산을 태산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몇 해 전 금강산 여행길에서 해본 그런저런 생각들이다.
양사언은 명필로도 유명한 만큼 금강산 만폭동에는 그가 쓴 글씨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 씌어 있다고 한다. 금강산 구룡연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여기저기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바위의 그 글씨를 짚어보면서 글씨를 쓴 사람과 또 그것을 새긴 사람들 마음을 동시에 생각해보았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는 시조를 읊을 때 양사언은 가마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마꾼의 숨이 턱까지 차올라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훈계와 푸념을 섞어 남 이야기하듯 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곁에는 무거운 연장을 짊어지고 힘겹게 따라가는 일꾼들도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산을 찾아 나서기를 즐겨했다. 동접이나 사제 간 혹은 가까운 벗들과 어울려 산을 오르며 우의를 다졌던 것이다. 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오른 일이나,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찾은 일 등은 기록에도 남아 있어 잘 알려져 있거니와 가까운 계룡산만 해도 여러 편의 유산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자료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마나 말, 나귀 등을 타고 산을 오르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와 같은 생각은 중국 여행 중에도 할 수 있었다. 장가계 금편계곡에서 본 한 무리의 가마꾼들, 태산에 올라가 보니 거기에도 그들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것을 기계가 대신하는 지금도 가마꾼이 남아 있으니 시황제나 한무제 같은 인물들이 걸어서 산을 오르지는 않았으리라. 태산이든 금강산이든 귀하신 분들은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시조의 내면의 목소리가 다르게 들려온다. 가마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가마를 메고 산을 오르고 있다. 그런데 '쯧쯧' 하는 귀하신 분의 걱정하는 소리가 등 뒤편으로 날아와 꽂힌다. 오르고 또 오른다면 태산이 아니라 그 위까지 오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 당장 자꾸만 주저앉는 다리를 어떡하란 말인가. 맥이 풀린 가마꾼은 남은 걸음을 더는 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처한 처지와 관점에 따라 대상이 달리 보이고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세종시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수한 논란의 말꼬리들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제각기 다른 처지와 관점들이 매달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고도 차이가 나는 처지나 관점들 가운데 정작 중요한 한 가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뜻으로 순순히 고향 땅을 내준 원주민들의 처지와 관점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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