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산 대전대 교수.시인·평론가 |
또 하나는 소수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다. 우리는 문명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미개인'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래서 문명을 통해 순화시키든지 몰아내야 할 존재로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문화나 가치가 이러한 소수자의 희생 위에서 구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한 사회 안에서도 일반화되어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존재들을 억압하고 말살하고자 한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파시즘이다. 바로 이 작품들은 이러한 소수자의 삶에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분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두 작품이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호응을 얻는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두 작품 모두 사라져가는 운명에 놓인 것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고 있다.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수천 년 간의 원시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러한 삶이 앞으로도 쭉 계속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문명의 힘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야 말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감할 수 있다. 아바타에 등장하는 <나비> 부족 역시, 비록 영화 속에서는 그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영화가 실제라면 결국은 인간에 의해 희생될 운명임을 우리는 직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라져갈 운명을 가진 것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들에 애정을 가진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바로 사람들의 이런 감성을 적극적으로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사라지는 존재들을 사랑할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사실 우리 모두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것들이 빨리 변화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변화에 적응해서 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임을 우리 모두는 매일 절감하면서 살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되어 나오는 새로운 제품, 자고 나면 바뀌는 새로운 제도들 그것들을 따라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적 무능력자가 되고 사회에서 내몰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때문에 사라져야 할 운명을 가진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편이 되는 것이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바로 거기에 우리가 잊고 지냈던 중요한 가치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