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영화감독 귀도. 하지만 그도 창작의 어려움에 빠져 든다. 촬영은 코앞인데 시나리오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그는 아무도 모르게 탈출해 휴양소로 직행한다. 그곳에서 현재와 과거의 여인들을 만나고 떠올리면서, 자신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는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지난해 8월, 하반기가 열리기 무섭게 할리우드 통신들은 “11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쓰기 시작했다. 그 때만해도 ‘나인’의 개봉예정일은 11월. 어서 보고 싶다는 달뜬 바람이었다. 개봉일이 자꾸 늦춰지자 “최대한 많은 상을 받기 위한 속셈”이라는 억측도 전해졌다. 개봉도 하기 전에 이미 기대만으로 ‘나인’은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 “가장 훌륭한 올해의 영화”로 ‘걸작’ 반열에 오른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달 초. 비로소 뉴욕 프리미어에서 공개되자마자 이 시사회만으로 골든글로브와 방송영화비평가협회 등은 앞 다투어 수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미국 영화계가 온통 ‘나인’에 흠뻑 빠져든 느낌이다.
‘나인’은 눈부시다.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놓는 매혹적인 춤과 퍼포먼스, 심금을 울리는 뮤지컬 넘버들은 눈과 귀를 황홀경으로 이끈다. 비현실적인 화려함에 대한 매료 또한 영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나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족시켜준다.
배우들의 면면은 더 눈부시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순 없다. 영화는 바람둥이 영화감독 귀도가 자신의 아홉 번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쫓아간다. 귀도가 자신을 둘러싸고 말을 걸어오는 7명의 여성과 벌이는 판타지가 큰 줄기다.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창작의 고통에 빠진 영화감독 귀도를 맡아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다.
스페인 출신의 뜨거운 여인 페넬로페 크루즈가 귀도의 정부 칼라가 됐고, 서글서글한 금발 미녀 케이트 허드슨이 귀도를 유혹하는 패션지 기자 스테파니로 출연, 스크린에 화려한 색감을 더한다. 귀도를 성에 눈뜨게 해준 거리의 창녀 사라기나 역은 힙합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기(스테이시 퍼거슨)다. ‘007’ 시리즈로 낯익은 주디 덴치가 방황하는 귀도에게 등대 역할을 하는 의상디자이너 릴리로 출연하고, 추억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 귀도의 어린 추억을 자극하는 어머니 맘마로 등장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이 보석 같은 배우들이 춤과 노래까지 선사한다. 무려 100만개의 크리스털을 사용한 화려한 36벌의 의상을 입고서다. 게다가 이들 여덟 배우의 지휘자는 롭 마셜 감독이다.
브로드웨이 안무가 출신인 그는 작품상 등 2003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한 뮤지컬영화 ‘시카고’로 평단과 대중의 호응,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마셜 감독은 ‘시카고’보다 더욱 진일보한 비주얼과 무대 연출력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로마 뒷골목의 여인 사라기나가 나오는 귀도의 회상 장면은 훌륭하다. 사라기나로 분한 퍼기가 부르는 ‘비 이탈리안(Be Italian)’은 그 자체만으로 관람료가 아깝지 않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는 가사를 따르듯 마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노래하고 춤춘다. 그 노래와 춤을 담아낸 리드미컬한 편집도 뜨겁고 폭발적이다.
아쉬움도 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나인’은 마치 귀도를 중심으로 한 9개의 쇼처럼 진행된다. 화려한 치장의 여배우들은 각자 따로따로 가장 섹시한 포즈의 춤과 노래로 귀도를 흥분시키고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각자의 퍼포먼스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볼거리지만 영화적으로 캐릭터의 연결고리는 헐겁기만 하다. 중반을 넘어서면 제각각의 쇼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온 코티아르, 케이트 허드슨, 퍼기가 한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대체 언제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다들 란제리만 입었단 말이다.
※영화 ‘나인’의 제목은
영화 ‘나인’은 동명의 뮤지컬을 밑그림 삼았고, 뮤지컬은 고전영화 ‘8과 1/2’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길’ 등을 남긴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은 영화 ‘8과 1/2’를 통해 창작의 고통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갈채를 받았다. 펠리니 감독이 이 영화 전까지 만들었던 영화는 장편영화 6편, 단편영화 2편, 공동연출작 1편이었다. 단편영화와 공동연출작을 1/2로 보면 7과 1/2인 셈이고, 그 다음 영화가 ‘8과 1/2’이 됐던 것이다.
모리스 예스턴은 이를 뮤지컬로 가져오면서 ‘여기에 음악이라는 요소를 덧붙이면 1/2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나인’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또 뮤지컬은 귀도가 9살 때 사라기나를 만나면서 성적으로 억압돼 성장하지 못했다는 모티브를 강력하게 부여한 까닭에, ‘나인’은 귀도의 9살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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