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연형 천양원 운장 |
장애의 몸을 가지고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서강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많은 수필과 번역서를 남기고 아깝게도 57세 나이로 지난 5월 암으로 사망한 장영희 교수의 경험담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녀는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1984년 뉴욕주립대학에서 6년을 공부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친구 집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는 10분 사이에 승용차 뒤 트렁크에 넣어 둔 가방과 함께 도둑 맞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책을 읽으며 지새웠던 밤들이 너무나 허무해 죽고 싶었다고 했다.
닷새째 되던 날 커튼 사이로 비추는 한 줄기 햇살을 보면서 신기하게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 있잖아. 논문 따위쯤이야”라는 희망의 속삭임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시작하여 1년 만에 더 좋은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
2003년 미국 루이빌에 살고 있는 큰 딸에게서 외손자가 출생하여 아내와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나는 처음 얻게 된 손주를 보는 일과, 그동안 간간이 써 온 글들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갔다. 1개월 동안 머물면서 나는 밤을 지새우면서 사위의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하여 플로피 디스켓에 약 300페이지 분량의 글을 완성했다. 이제 귀국하면 생애 처음 책 한권을 출판한다는 기쁨에 가슴 뿌듯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귀국 후 바로 다음 날 나는 디스켓에 저장된 글들을 컴퓨터 본체에 저장하려고 조작하는 과정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덮어씌우기를 반대로 하는 바람에 모든 글들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복구는 불가능 했다. 나는 허탈감에 빠져 2년여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해 보려하면 날아가 버린 글들이 너무 아까웠다는 생각과 “넌 어찌 그런 실수를 했단 말이냐”라고 질책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2년여가 지난 2005년 12월 31일 교회에 나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다시 시작해 봐. 새로 출발하는 날이 왔잖아. 다시 시작 하라고”라는 재촉하는 소리에 잃어 버렸던 글들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4개월 노력 끝에 받은 사랑 풀어내 놓아라라는 제목의 책을 2006년 4월 30일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장영희 교수가 절망과 희망은 늘 우리들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 그 논문을 훔쳐가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 해 마지막 날 희망을 잃고 좌절에 빠져 있는 아동·청소년들에게 새해라는 공평한 출발선에 나와 `다시 시작하라'고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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