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덕 국가기록원 원장 |
실록에는 당대의 인물, 정책, 외교·군사, 법률, 경제·산업, 교통·통신, 사회, 풍속, 천문, 천재지변, 음악, 상소와 비담 등 수많은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시대를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록을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방대한 실록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편찬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제외하더라도, 약 500년에 걸쳐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던 것은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여 운영해왔던 점과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성리학적 이념은 조선의 건국 초부터 국왕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간직했던 근본사상이었다. 군주의 언행도 백성을 위한 일에서 벗어날 경우,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강력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이러한 성리학적 이념의 사회적 확산과 후대 전승을 목적으로 실록의 편찬과 보존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은 공자의 ‘춘추필법’에 따라 서술된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실록 편찬은 다른 어떠한 현안보다 중요한 시책이었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실록편찬 작업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관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를 바탕으로 상소문, 문집 등 각종 자료들을 활용하여 초안을 작성하여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실록을 완성하였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실록의 편찬에는 사관이 작성한 사초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관은 직급이 낮았지만, 항상 국왕의 옆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하여 남긴 것이 사초였다. 특히, 사관이 집에서 기억을 되살려 작성·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家藏史草)에는 당대의 권력자들과 현안에 대한 사관의 냉철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가장사초의 내용이 실록에 거의 그대로 실렸던 점에 비춰보면, 사관이 어떤 자세로 사초를 작성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관의 선발도 엄격하여 가문에 흠이 없는 문과급제자로서 정직성, 학식, 재능을 두루 갖춘 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사관의 냉철한 평가를 살펴보자. ‘명종실록’에 따르면, 외척들이 권세를 다투어 국가를 크게 그르치고 있으며, 임꺽정을 비롯한 도적의 성행에 대해 “수령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니, 곤궁한 백성들은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라는 기록 등 사관은 당대 사회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때문에 국왕과 신료들은 모든 국정의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사관에 대해 두려워했으며, 이로 인해 사관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중종 때 사관이었던 안명세(安名世, 1518~1548)는 을사사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한 사초로 인해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한 ‘명종실록’에는 안명세의 행위가 “사실에 의거해서 바르게 기록하고 춘추의 뜻을 덧붙인 것이며, 이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사관인 동호(董狐) 같은 직필(直筆)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국왕과 신료들이 실록과 사관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하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도 적지 않다. ‘정종실록’에는 “군주가 두려워 할 것은 하늘과 역사이며, 사관이 군주의 선악을 만세에 전하니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이 노루 사냥 중에 말에서 떨어지자 좌우를 돌아보며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으나, 사관이 태종의 이 말까지도 실록에 기록했다는 내용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기록에 대한 사관의 투철한 정신과 사명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목숨을 건 사관의 직필정신 덕택으로 실록이라는 기록유산을 이어받은 우리들은 과연 후대에 어떤 기록유산을 전승해야 할 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 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는 연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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