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 안방까지 들리던 국군장병들의 아침 점호소리는 대전에서는 더는 들을 수 없게 됐다. 과거 대전지역 곳곳에서 마주치던 군사시설의 국방색 담장은 하나씩 허물어지고 이제는 흔적 찾기가 쉽지 않다. 군사적 요충지였고 많은 군부대가 주둔했던 과거 대전지역 군시설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 1970년대 공군기술교육단 관사 (현재 탄방동 위치) |
▲`국방경비대' 지역의 첫 창설부대=대전에서 처음으로 구성된 군사조직은 국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경비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전시 100년사에 담긴 충남대 박재묵 교수의 `대전의 도시성장과 군사도시'에 따르면 “1946년 2월 28일 지금의 서구 갈마동에서 국방경비대 제2연대가 창설됐다”고 기록됐다. 현재 갈마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뒤편에는 국방경비대 제2연대 창설지지비가 남아있어 그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창설지지비에는 “여기는 조국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애국청년들이 계속 입대하여 연대를 창설하고 창군의 위업을 달성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고 새겨 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대전에 육군 제2사단(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6월 28일부터 7월 14일까지 대전은 임시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란을 피해 대전에 내려와 임시수도의 역할을 했다. 선화동에 위치한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과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은 유엔군 총사령부 한국전략지휘소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항공교육의 중심지 `둔산'=옛 대전비행장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대전의 대표적 군사시설이다. 옛 지명으로 둔지미 마을 남쪽에 자리했던 대전비행장은 일제 강점시기 학생들을 동원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시청, 정부대전청사 등 지금의 서구 탄방동과 둔산동 주변에 옛 대전비행장 부지가 있었다. 대전비행장은 활주로 길이가 비교적 짧아 연습용 경비행기의 교육장으로 사용됐다.
대전비행장 주변에는 공군기술교육단(후일 공군교육사령부)과 3군관구사령부, 육군통신학교와 헌병대, 법무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공군기술교육단은 1956년 9월 창설돼 이미 공군이 사용하고 있던 대전비행장에 자리잡았다. 기술교육단은 1973년 4월 제3훈련비행단을 예속시켜 공군교육사령부로 승격ㆍ창설됐다. 비행장을 갖춘 대전은 공군교육의 중심지가 돼 둔산지구 개발로 공군교육사령부가 진주로 이전하기 전까지 전국에서 공군에 자원입대하는 하사관과 일반병들의 입소와 훈련, 특기교육을 담당했다.
▲ 옛시청(현중구청)옆에 있던 제8360부대 |
유승기업사 앞에 위치했던 교육사령부 정문은 입소일엔 전국서 몰려든 젊은이들과 배웅객들로 북적였다. 훈련과 교육 수료후엔 파란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휴가와 자대배치 등을 위해 대전역과 터미널 등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대전에서 쓴 숙식비 등은 당시 대전경제에 많은 보탬을 줬다.
유승기업사 뒤편에서 경성큰마을까지는 육군통신학교가 위치했었다. 3군관구사령부는 그 맞은편 계룡로와 맞붙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기간 거대한 비행장과 각종 군부대가 둔산지역 일대에 주둔해 이들 군부대 안에는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해 수목원을 방불케 했었다. 이들 나무들은 둔산택지개발 때 모조리 베어져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들 군부대가 둔산지역 인근에 밀집함에 따라 유성으로 이어지는 계룡로를 건설할 때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김보성 행정동우회 회장은 “당시 시내에서 유성으로 가는 길은 군부대 담장 사이로 좁은 골목으로 다녔다. 군부대 담장을 허물고 꽃밭을 조성한 정책은 현재의 계룡로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됐다”고 회상했다.
현재 시청 서편에는 옛 공군비행장 등을 기억하고자 공원 이름을 보라매 공원으로 지었으며 이 지역 곳곳에 전투기 모형 등이 설치돼 있다.
▲문화동, 보병위주 주한미군까지=중구 문화동 일대에도 대규모 군부대가 주둔했었다. 현재 서대전시민광장 일대에는 육군병참학교와 제63육군병원, 제9병창정비보급창이 자리해 담장이 수백까지 이어지던 곳이다. 국방군사연구소가 편찬한 한국전쟁지원사에 따르면 육군병참학교는 1950년 6월 30일 대전으로 이동해 문화동 1 에 자리했다. 제63육군병원은 전쟁 중이던 1951년 창설돼 대전여자고등학교에서 환자 241명을 치료해 육군병원으로 자리잡았다.
▲ 1980년대 육군통신학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도시개발을 위한 공사가 진행중인 모습. |
문화동 일대에는 미군도 주둔했었다. 대전고등학교와 인접한 곳에 규모가 크지 않은 미군부대가 1970년대 후반까지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전지역 외곽에는 몇몇 부대가 더 주둔했다. 대덕구 회덕동에 주둔했던 캠프 에임즈(Camp Ames)에는 대구에 본부를 둔 19지원사령부 산하의 제6병기대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정확한 사항은 파악되지 않는다. 세천 방면에는 포항의 캠프 리비(Camp Libby)로부터 들어온 유류를 송유관을 통해 미군부대에 공급하는 유류저장소가 있었다.
▲도시의 확장, 군부대 이전=1970년대 이후 대전 도시의 확장과 군부대 이전 중 선·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맞물려 대전시는 시세 확장에 들어갔다.
둔산지역은 1985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변화를 맞는다. 둔산동 일대에 주둔했던 군사시설은 개발이 들어간 1988년쯤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앞서 문화동 일대의 군부대는 1976년 육군 병참학교와 제64육군병원이 대전을 빠져나갔으며, 제9병창정비보급창은 1990년대 후반 이전을 마쳤다.
▲연구단지를 기반으로 군 산업도시로=자운대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비롯해 대전 인근의 계룡시에 위치한 계룡대는 지역을 대표하는 군 시설로 자리매김했다.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에 따라 기계창으로 불린 ADD의 대전 노은지구 인근 입주와 더불어 1983년 일명 620사업으로 알려진 계획에 따라 육ㆍ해ㆍ공군의 3군본부가 신도안으로 이전했다. 1989년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먼저 계룡대로 이전했으며 1993년 해군본부가 옮겨오는 것으로 계룡대는 한국 3군의 수뇌부가 모이는 결정체가 됐다. 또 1990년대 초부터 조성된 자운대는 육ㆍ해ㆍ공군의 3군대학과 전투지휘훈련단, 육군종합군수학교, 육군통신학교, 군의학교 등이 입주해 있다. 이어 군수사령부까지 입주해 자운대는 3군교육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대덕연구개발특구를 기반으로 국방산업체도 속속 입주 예정으로 있어 대전은 과거의 군사도시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대덕특구 내에 국방산업 클러스터가 조성돼 국방산업과 관련된 전국 7개 사업체의 유치가 최근 확정돼 기존 항공우주연구원, ADD등과 연계해 대전이 국방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를 전망이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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