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말썽거리가 띄엄띄엄 없는 건 아니나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전쟁이 없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신을 가까이 섬겨 왔으며 유교적인 심성이 깔려 있고 무엇보다 인종 갈등이 없다. 그렇지만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분쟁,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팔레스티나 종교분쟁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끼리의 반목은 사회통합의 심각한 저해 요소로 작용한다.
종교 간 화합과 이해는 이런 측면에서 단순한 의례 이상으로 주목된다. 성탄절을 맞아 광수사 장도정 주지스님, 삼수사 방경혜 주지스님 등이 천주교 대전교구 유흥식 라자로 주교를 찾아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화분을 건넸다.
불교계의 성탄축하는 지난 부처님오신날 유 주교가 광수사를 찾아 봉축법요식에 참석해준 데 대한 `품앗이' 형식이고 요 몇 년 그래 왔지만 신선함은 줄지 않는다. 남의 집안 잔치를 흔쾌히 축하해주는 넉넉한 품이 오롯하다. “예수의 탄생! 우리 모두의 기쁨”. 강화도 절집 입구에서 현수막과 마주치고 머릿속이 다 환해진다.
최근 필자는 스님으로부터 이승철 노래를 배웠다. 비구니한테 기독교인들이 배운 사실 하며 세속을 등진 도리암직한 스님이 하필 유행가인가도 신기해 배워봤다. 호기심이 풀린 시점은 1절을 마스터하고, 노래로 전하는 부처님 메시지였음을 저절로 깨우치고부터다. 종교가 있거나 불신앙의 자유를 누리건 여기선 무관한 일이다.
종교를 아편으로 폄하한 마르크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 종교경험을 유아기적 환상으로 본 프로이트 입장에 서는 것도 자유다. 다만 전쟁보다 평화를, 증오보다 사랑을 강조한 종교일수록 생명력이 질기다. 종교에서 이럴 때 배우는 미덕은 우월성이나 오만이 아닌 겸손이다. 잔칫집 비유, 겨자씨 비유는 그래서 좋다.
잔칫집에서 상석에 앉다 보면 윗사람이 와서 말석에 밀려나는 굴욕(?)을 당하지만 하석에 앉으면 상석으로 높임 받을 수도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현실과 부딪히면서도, 만고의 진리다.
은퇴한 어느 목사분이 이스라엘 여행 선물로 준 겨자씨를 간직하고 있다. `깨알' 크기다. `담배씨'만하다 할까. `겨자씨'는 작지만 장차 새들이 깃들어 하느님(하나님)나라에 비유된다. 옥천에서는 오늘 성탄 전야를 맞아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유교 합동미사가 드려진다. 울긋불긋 아름답겠다. 겨자씨 비유는 코란에도 불경에도 나온다. 불교에서 광활한 삼천대천세계를 한 톨의 겨자씨같이 여기기도 한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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