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만 변호사 |
먼저 상앙은 당시 수도인 함양 남문에 높이 3 장(丈)의 나무기둥을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10 금(金)을 주겠다는 방을 붙였다. 하지만 나라에서 어렵지도 않은 일에 거액의 상금을 줄 리 없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아무도 응하지 않자 상앙은 상금을 높여 50 금(金)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때서야 한 백성이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는지 나무기둥을 옮겼고 상앙은 약속대로 그에게 50 금(金)을 주었다.
그 소문이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지자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믿게 되었고 상앙은 추진하려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는 고사(古事)에서 유래된 말이 이목지신(移木之信)이다. 또한 상앙은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윗사람들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法之不行 自上征之)이므로, 법을 어긴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한번은 태자(太子)가 중한 죄를 저지른 귀족을 숨겨주는 죄를 범하였는데, 상앙은 차마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벌할 수는 없고 대신 태자의 스승인 공손 가의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시종장인 공자 건의 코를 깎는 중형을 가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법으로는 일정한 신분 이상의 귀족은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상앙은 법 앞에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고 이후 백성들은 법을 지키고 감히 아무도 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를 수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상앙을 중용하고 힘을 실어 주던 효공(孝公)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여 진 혜왕(秦 惠王)이 되었다. 태자 시절 상앙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던 진 혜왕은 즉위하자마자 상앙을 삭탈관직하고 군사를 시켜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상앙은 신분을 감추고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던 중 여관에 들어가 방을 구하려 하였으나 상앙 자신이 만든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은 재워줄 수 없다'는 법령 때문에 체포되어 거열형(裂刑)에 처해지게 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상앙의 인물됨에 대하여 `천성이 각박하여 복이 적다'라고 평하였고, 필자도 학창 시절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법을 공부하고 다루면서도 법가의 사상이나 상앙에 대하여 후한 평가를 주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라는 말도 있듯이 상앙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도 한(漢)나라 이후 유교사상에 젖어 있는 후세의 사가들이 내린 혹독한 평가일 수 있다면 상앙의 사상이나 정책이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법은 국민과의 약속이고 지키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약속도 변경될 수 있고 원칙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약속이 지켜지기보다는 바뀌는 경우가 더 많고, 예외가 원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앙이 정치를 하던 전국시대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세종시 문제로 열병을 앓고 있고, 전·현 정권 실세 고위직들의 비리문제가 대서특필되고 있다. 오늘 아침 불현듯 이목지신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것은 필자가 법조인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