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철 시인 |
동시에 글 쓰는 교사가 되려 했었다. 글은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는 우물이므로 더욱 순결하고 반드시 치열한 양심의 승부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즈음 자취방 문짝 안쪽에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을 붙여놓고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았다.
그들은 통이 굵거나 눈이 맑았고 절망의 시국을 혼신으로 받쳐내었으므로 후세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했고 그네들의 닮은꼴을 꿈꾸는 것을 오래전부터 점지된 숙명인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게 감격이었다. 논산의 저녁놀이나 공주의 강물, 춘삼월 천안 삼거리 물오른 능수버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봄바람을 느끼면서 사무침을 견디지 못해 펑펑 울기도 했다. 남보다 진하게 `유목'을 느끼면서, 내가, 우리가 `정착' 이전에 반드시 세워야 할 무엇이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왜 학교에서 쫓겨났는지 이유를 모른다. 부조리를 폭로한 소설 한 편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래서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는 모 관료의 언어를 끝까지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한 생명체의 평생 밥줄이 그렇게 한 방에 댕강 날아가는 현실에 어리둥절했다.
장군 출신의 최고 통치자가 툭 젓가락을 멈추자 하급 관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때린 건지 아니면 알아서 만드는 충성 경쟁의 윤전기에 걸려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신새벽 초인종 소리, 고가도로로 올라가던 승용차, 경찰서 과속방지턱 지날 즈음 뿌옇게 터지던 여명의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어디선가 많이 만났던 흔적처럼 느껴졌다. 스크린의 진행이 갑자기 멈추더니 예기치 않던 장애물이 갈고리를 풀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아프고 분했었다.
문제는 소통이다. 언제부터였나, 자신만의 몸만들기에 몰입하는 벗들의 행태에서 높아가는 벽을 보았고 더러는 단절의 냉소를 쓸쓸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랬다. 나의 배경들은 든든한 바람막이로 지켜주기도 했고 더러는 무너지는 전봇대로 길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초겨울 나는 전봇대 깨진 가로등 아래서 `나는 약하다'는 절망의 문장을 토로하면서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이제 장년이다. 임플란트와 굽은등을 손님처럼 맞이하면서 오늘도 활자와 브라운관을 아프게 바라보는 중이다. 오늘은 시국대회 참가로 줄줄이 징계 받는 기사가 컴퓨터 메인 보드에 떠오른다. 98명의 징계 해당자 중 17명이 파면 해임이란다. (지난 12월 15일 연합뉴스) 현재의 그들과 예전의 실루엣을 겹쳐놓으며 밥의 무게를 되새김질한다.
짐짓 구들장의 세속으로 빠지지 않으려 허우적거린다. 이제 그늘이 되고 싶다. 비탈길 걷던 민초들이 다가와 상처투성이 부은 발등을 식혀주는 느티나무 성성한 가장이로 머물고 싶다. 눈물 훔치는 벗들의 목 축여주는 샘물로 남기에는 아직 힘도 마음도 충분하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한 해가 다가도록 눈발이 내리지 않아 외롭던 그해 겨울,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시는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장년의 사내, 울면서 글을 쓴다. 배추 뿌리 뽑아낸 자리마다 억새풀 하얗게 흩날리는 초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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