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부에 각종 신청서를 내놓고 그동안 열심히 끈 대고 뒤를 찾아 `작업'을 해 온 대학들은 마지막 선고의 순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발표일을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표가 있는 날이면 텔레비전에서는 `톱기사'가 되고, 신문에서는 요즘 입시학원에서 나누어주는 배치표 같은 표를 만들어 보도하곤 했다. 그 시절 문교부는 가히 대학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쥔 엄청난 권력이었다.
힘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냄새가 나게 마련인 법. 각종 인허가 관련 교육비리가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던 것도 그 때는 하나의 풍속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교과부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집단이다. 교과부 허가 없이는 정원 하나 늘리고 학과 하나 증설하는 일이 불가능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대학들이 정해진 일정에 맞춰 입시를 치러야 하고, 선발방식도 철저하게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 교과부가 안된다면 절대로 안 되고, 하라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하는 힘의 구조는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국가권력이 대학에 `삼불정책'같은 것을 강제하고, 교과과정 편성에 개입하여 교과목 이름까지 지어주며 간섭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정책에 일관성이라도 있고 집행에 공정성이라도 있다면 그 진정성을 믿어 볼 만도 한 일이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불만은 쌓이고 불신은 높아만 간다.
나는 자주 우리나라의 교육이 꼭 교육이 아닌 훈련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너무나 규범적이고, 구호와는 달리 교육 주체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지나치게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다. 훈련장 안에서는 교육자나 교육대상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 목표가 무엇이든 교육은 오로지 그 목표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성취해 낼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또 그러한 수단과 방법들이 동원된다. 교육이란 어차피 본질적으로 상당부분 일방통행적일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긴 하지만, 훈련이야말로 완벽하게 일방통행적인 교육방법이랄 수 있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그곳에 이르기 위한 지름길만을 찾는 노력은 어디까지나 `훈련'일 뿐 교육은 아니다.
`자율성'과 `창의성'이란 말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육정책에서 핵심적인 화두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학교 현장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한갓 허구일 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학교의 선발권도 학생의 선택권도 제한된 현행 입시제도는 교육이 추구하는 자율성과 창의성이라는 본질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개성이라곤 없이 그 학교가 그 학교인 모습을 하고 있는 성냥갑 건물 안에서, 국가가 정한 똑같은 규범과 질서 속에 자라며, 오로지, `입시'라는 똑같은 목표를 위해, 똑같은 내용의 교과를 똑같은 형식으로 전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학교교육의 현실에서 어찌 자율성과 창의성을 기를 수 있겠는가.
교과부는 교사들의 수업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들을 하루가 멀다 하게 쏟아내고 있다.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크나큰 모순이다. 교사의 역할이란 것이 기껏 `전달교육'에 지나지 않도록 만들어 놓고 학생들의 학력부진을 교사들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교재로, 정해진 내용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 정해진 시간만큼 가르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지금의 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탁월한 수업능력을 가진 교사라 하더라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소를 부리는 농부는 절대로 소 앞에 서지 않는다. 말을 모는 마부는 마찬가지로 말머리에 서지 않는다. 언제나 뒤에서 고삐를 채고 뒤에서 채찍을 가할 뿐이다.
소 앞이나 말 머리에 서는 것은 그의 의도를 제지하고 막아 설 때 뿐이다. 교과부의 역할이란 소를 부리는 농부나 말을 모는 마부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 언제나 학교와 교사와 학생들 위에 군림하여 시시콜콜 간섭하고, 앞장서 끌려고만 드니 우리 교육이 실타래처럼 꼬이는 것이다. 교과부가 이같은 구태에서 서둘러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미 교육계 일각에서 솔솔 일기 시작한 `교과부 폐지론'같은 거센 역풍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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