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살고 있는 노년의 가슴시린 우정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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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살고 있는 노년의 가슴시린 우정과 사랑

  • 승인 2009-12-28 15:01
  • 신문게재 2009-12-16 12면
  • 황선애 한밭도서관 사서황선애 한밭도서관 사서
직장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꼽으라면 역시 업무보다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유달리 인기 많은 직원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누군가 끼어 주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인기 많은 인기녀(?)들을 관찰도 해보지만 타고나는 건지 좌중을 휘어잡은 그녀들의 유쾌 통쾌한 언변을 따라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인줄 진작 깨닫게 된다.


▲ 그대를 사랑합니다[강풀 지음/문학세계사]
▲ 그대를 사랑합니다[강풀 지음/문학세계사]
어느 날인가 난 이들의 공통점을 알아내는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건 바로 만화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 녹아있는 위트와 유머의 원천이 어려서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즐겨읽는 만화책이었던 것이다. 내 이 발견에 `여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데요'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주변에서 보아온 결론이니 영 탐탁지 않아도 한번 눈감아 주기 바란다.

80을 앞둔 노인들의 사랑이야기인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소개하려고 만화 이야기를 길게 시작했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연극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으며 올해 대전시민이 같이 읽어볼 책으로 끝까지 1위 책과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의 상가에서 `호상(好喪)'이라는 말에 노인네가 살다 죽으면 다 호상이고 살만큼 살았으니까 죽는게 당연하냐며 화가 난 김만석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분은 잠시 멈칫 하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상가에서 입에 담아 봤을 단어가 아닌가.

주민등록에도 올라 있지 않아 77세를 그냥 `송씨'로 살아온 송씨 할머니 주변엔 할머니가 주워온 폐지 위에 무게가 더 나가도록 몰래 물을 뿌리는 고물상 주인과 겨울 눈 쌓인 내리막 골목길을 몰래 리어카 뒤꽁무니를 잡아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김만석 할아버지와 그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장군봉 할아버지가 있다.

송씨 할머니가 주민등록에 `송이뿐'이라고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고 치매 걸린 아내를 집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장군봉 할아버지. 만화 대사 중 한 장면 그대로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에 펼쳐지는 이 따뜻하고 애틋한 우정과 사랑이야기는 보는 내내 화장지를 옆에 끼고 있게 할 정도다.

이 작품의 작가 강풀은 30대다. 강풀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앞으로 몇 년간 할 이야기들을 축적해 놓고 계획을 짜고 만화를 그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계획에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모두 돌아가시고 친할머니만 살아 계셨는데 1년에 두어번밖에 할머니를 뵐 수 없었다고 한다.

서른 중반 즈음 가정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부모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할머니를 모셔오는 일이었고 그때 할머니 연세는 93세였다고 한다. 그때까지 노인하면 공원에서 비둘기를 쳐다보고 앉아 있거나 노인정에서 쩜 십짜리 고스톱 치면서 세월을 보내는 무기력한 이미지였었는데 할머니와 가까워지면서 많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작가는 “할머니의 가슴속엔 여전히 소녀가 살고 있고 내가 `철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일상'으로 알고 계셨고 내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을 당연히 `알고'계셨다. 할머니는 세월을 보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세월을 살고 계신 것이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감정들이 가슴속에 살아 잇기 때문에 노인분들이 더욱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분들의 사랑을 꼭 만화로 그리고 싶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손주들에게 저런 느낌을 전해줄 수 있게 늙어갈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강풀 작가는 만화를 그리면서 복잡한 주인공간의 관계들을 늘 계산해 두고 그리는데 그런 계산없이 만화를 그리기는 처음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만화를 그리는 동안 참 행복했다고 한다. 이 말 만으로도 이 작품이 가지는 행복수치가 얼마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만화책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감히 추천하건데 이 겨울을 넘기지 말고 꼭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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