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완하 시인. 한남대 문창과 교수 |
그랬다. 12월로 들어서 아침저녁으로는 싸늘한 기온이 목덜미를 스치고 있다. 그럴수록 디아블로의 풀빛은 더 짙어가는 게 낯설기만 하다. 겨울로 열린 시간을 향해 푸른 풀들은 초록빛을 더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곳의 겨울은 섭씨 영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하니, 푸른빛으로 감싸인 버클리 그것이 이곳의 겨울이겠다. 겨울을 감싸 안은 푸른빛과 그 안에서 새롭게 초원을 펼쳐가는 겨울, 그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이 세상 어디에도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 사회를 안다는 것, 다른 사회를 겪는다는 것은 얼마나 그 바닥을 들여다보아야 가능한 것인가. 얼마나 깊이 그 바닥에 가 닿아야만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가야만 우리에게 버클리는 제 심장을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버클리에는 분명히 여러 개의 모습들이 함께 있다. 화려함과 기쁨 그 이면에 잠복하여 알 수 없는 깊은 침묵이 함께 흐르고 있다.
버클리는 언제나 새로운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이 정상 범위 안에서라면 무한한 자유와 여유로 오겠지만, 그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다가와 티켓을 발부한다. 우리는 언제나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를 밟고 사는 게 아닌가. 이곳에 온지 3개월을 지나면서 버클리는 나에게 서서히 그 이면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집중해 있다가 나의 일상이 작은 규정을 벗어나는 순간, 가차 없이 다가와 티켓을 들이밀었다. 그것이 내가 버클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인가.
이곳에 와서 우리는 겨울로 들어서며 서서히 버클리의 더 깊은 바닥으로 가닿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항시 우연과 필연 사이를 밟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우연이며 필연일 것이다. 내가 버클리에 오게 된 것도 우리 가족이 이곳에 와서 1년을 살게 된 것도 모두가 다 필연이고 우연일 것이다.
어디에나 겉모습과 속 모습은 따로 있고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모습을 다 보았을 때에야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이해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버클리에 와서 정확히 3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야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버클리의 거리에는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한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고요 속에서는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냉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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