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유민 흔적 찾는 작업 대부분 일회성 끝나 아쉬움 남아
韓-中 네트워크 구축·연구자 양성 제도적 장치 마련 시급
▲ 아래서 바라다본 응천문루 |
백제국이 멸망 한 후 의자왕을 비롯해 왕족과 유민들이 포로로 끌려간 곳도 이곳이며 훗날 이들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묻힌 곳도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국으로 끌려온 백제인의 한 가닥 소망은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부여씨 불상으로 남겨져 이곳을 찾는 후손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많은 백제인들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뤄양의 북망산은 의자왕 무덤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제의 한이 서린 응천문루=중국은 지난 1990년 응천문루를 발굴한 후 일부 복원했다. 누각의 형태까지 완벽하게 복원한 것이 아닌, 성곽의 일부만 복원한 상태다. 안내 표지판에는 `수당 뤄양 동도성 응천문 유지(隋唐 陽 東都城 鷹天門 遺址)'라고 적혀있다. 응천문의 본래 이름은 측천문이다. 605년 수양제가 뤄양성을 신도(新都)로 축성할 때 만들어졌는데 621년 당 태종 이세민이 뤄양성 점령 후 불태워버렸다. 이후 당 고종이 다시 수리해 궁성의 정문으로 삼았다.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응천문은 수난을 당했지만 수당 시기 조정행사 때나 중요 국가 대사 때 행사를 펼치던 곳이기도 했다. 외교사절이 올 경우 황제는 이곳까지 나와 예를 갖췄다. `당 현종도 일본 사신을 이곳에서 맞이했다'고 안내 표지판에 기록돼 있다. 705년 당 중종은 자신의 어머니 측천무후와 이름이 같다하여 측천문을 응천문으로 고쳤다. 문루 위는 동편 쪽 30m 가량만 복원됐으나 본래 양쪽 폭의 길이가 83m에 달했다는 것이다. 멸망한 백제 의자왕 등 일행이 중국에 끌려온 후 660년 11월 처음 당 고종과 만난 곳이 바로 뤄양의 측천문루 즉, 응천문루였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해 1만 2000여명에 달하는 백제의 포로들을 응천문루에서 당 고종에게 전리품으로 바쳤던 것이다. 백제국 정든 산하를 떠나 낯선 중국 땅 응천문 누각 앞에 끌려와 무릎 꿇은 의자왕과 왕족 및 백제국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떠했을까. 13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백제인의 한과 눈물과 두려움이 배어 있는 듯한 응천문루인 것이다.
▲ 응천문루 위의 풍경 |
그러나 이 예식진 묘지명은 한국인들에게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유물 가운데 하나다. 기자 신분을 감춘 채 찾아간 본보 취재진에게도 묘지명의 탁본을 슬그머니 한쪽 구석으로 숨길 정도의 예민한 반응과 함께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
예식진 묘지명은 덮개와 비문 탁본 등이 함께 전시돼 있는데 묘지명 덮개의 경우 가로 세로 각 57㎝의 정사각형으로, 두께 15㎝의 규격이다.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기록된 글자는 다음과 같이 4자씩 모두 16자다.
즉,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將軍?寔進墓誌之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난 2007년 뤄양의 골동품 상가에서 처음 발견된, 시안(西安) 출토 백제 유민 묘지명의 주인공 예식진은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겨 웅진으로 피신한 백제 의자왕을 포로로 잡아 연합군에 넘긴 예식이란 인물과 동일인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뤄양시 이공대학에 전시중인 묘지명은 가로 세로 58.5㎝, 두께 13㎝ 규격의 정사각형으로 돼 있다. 모두 18행이며 행마다 18자 미만의 해서체 글씨로 288자가 새겨져 있다.
묘지명에는 `백제 웅천(熊川·지금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당에서 좌위위대장군을 역임했으며 그의 조부는 좌평 예다(藝多)이고 부친은 좌평 사선(思善)'이라고 적혀있다. 또 `그가 당 고종 함형(咸亨) 3년(672년) 5월 25일 내주(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고종의 명에 의해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렀으며 그해 11월 21일 시안의 고양원(高陽原)이란 곳으로 옮겨져 묻혔다'고 새겨져있다. 묘지명에는 `보검을 한번 휘두르면 별처럼 반짝거렸고 활시위를 당기면 둥근 보름달 같았다'며 예식진의 무예의 출중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총애가 성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이 빨리 찾아와 슬프고 허무하다고 애도했다.
묘지명과 관련해 청계천문화관 김영관 관장은 “백제 의자왕이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자료임은 물론 백제사에서 알려진 `대성 팔족(大性 八族)' 즉, 백제의 왕족 또는 지배층인 여덟 성씨 이외에도 예씨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뤄양 이공대학 도서관에 전시중인 예식진 묘지명 탁본 |
당 고종은 의자왕이 죽은 뒤 조서를 내려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왕인 손호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왕인 진숙보의 묘 옆에 장사하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즉 뤄양 북망산에 묻힌 것이다. 학계에서는 의자왕의 묘가 바로 지금의 봉황대 일대에 존재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300여년이 흐른 오늘날 의자왕의 묘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부여군은 지난 2000년 의자왕과 부여융 부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묘와 제단을 설치했다. 특히 뤄양시로부터 기증받은 부여융 묘지석 복제품도 함께 안치했다.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 안에 설치된 가묘에는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 지석을 탁본해 실제 크기로 만들어 안치했다.
부여군 문화관광과 여홍기 계장은 “백제학에 대한 연구자가 부족한 실정이다. 대학의 학부생조차 없다. 결국 백제학에 대한 연구 및 연구자를 양성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또 김영관 관장은 “의자왕 무덤 탐색 등 백제 유민의 흔적을 찾으려는 작업이 대부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한 가지 행사를 진행하고 끝나기 때문에 중국과의 네트워킹이 되지 않는데 이같은 오류에서 벗어나 전문가들의 꾸준한 교류를 이어가야 뭔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뤄양=글 박기성·사진 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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