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음악교사 홍무혁, 동생 고등학생 찬혁, 아버지 대학교수 홍만석, 어머니 명애는 밤이 되면 의적 활동을 벌이는 홍길동 가문의 후예. 이들은 요즘 정재계를 손에 쥐고 흔드는 이정민의 비자금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다. 무혁을 돕던 정보원이 살해당하는데.
후손들이 모두 의적으로 살았기에 가족이 뭉쳐 ‘도둑질’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머니가 금고를 가진 상대의 지문을 빼내고, 이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넘겨주면 아들은 지문을 이용해 금고를 터는 게 개연성을 얻는 거다.
하지만 소설 속의 홍길동이 쓰던 분신술이며 축지법 같은 도술은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21세기 홍길동은 첨단장비를 동원해 금고를 털고, 승합차에 끼어 이동한다. 영화 후반, 납치당하는 애인을 구하기 위해 자동차를 쫓는 추격전. 야마카시와 자전거의 활용, 한국적인 언덕 지형과 버무린 시퀀스는 설계도 단단하고 속도감도 좋다.
한국적 냄새가 물씬하고 서민적이다. 그래서 그 어떤 히어로 영화보다 재미있다.
‘홍길동의 후예’가 발칙한 상상을 제대로 살린 영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오락영화에 장기가 있는 정용기 감독(‘가문의 영광’ ‘원스 어폰 어 타임’)과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의 각본을 쓴 박정우는 캐릭터 코미디와 액션 시퀀스의 잔재미를 잘 뽑아낸다.
현실에 대한 풍자적인 내용과 상황에 따라 터져 나오는 웃음코드의 배합이 절묘하다.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의적으로 활동하며 벌어지는 정체성 코미디는 이범수 성동일, 그리고 의외로 이시영의 탄탄한 코미디 감각과 잘 어울린다.
이시영은 주인공 홍무혁의 여자 친구 송연화 역. 겉보기엔 청순가련이지만 진짜 모습은 걸쭉한 사투리와 거친 말투로 남자를 휘어잡는 천방지축 엉뚱녀 역할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동안 한국형 슈퍼 히어로를 탄생시키려는 영화는 많았다. 이를테면 류승완 감독의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김수로 주연의 ‘흡혈형사 나도열’이 그런 시도였다. 하지만 성공했다고 보기엔 미흡했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의 인물을 현대로 끌어온 아이디어는 꽤 좋다. 한국형 슈퍼 히어로 탄생을 점쳐보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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