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 |
귀국 초, 새롭게 대면한 우리사회의 이기심이 상당한 충격이었고 이러한 행태의 일상적인 확인이 항시 길거리에 즐비한 거대한 간판들이었던 점을 회상하면, 이제는 이 간판들의 존재가 길찾기의 소중한 단서가 되고 그들이 뿜어내는 현란한 조명은 점차 뿌연해지는 나의 시력을 보완해 주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는 요즈음의 나의 모습은 주위환경에 속절없이 함몰되는 나약한 소시민의 전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 문을 연 대흥동 문화원 분원의 적막함을 조그만 간판의 탓으로, 또는 이웃동네의 불야성과 비할 바 없는 몇몇 초라한 전등의 탓으로 치부해보려는 유혹이 새록새록한 요즈음의 모습에야.
정보제공과 홍보가 간판의 두 가지 대표적인 기능이라면, 우리의 간판들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근시안이고, 상상력이 심각하게 결핍된 집단이라는 병적인 우려에서 출발한다. 모든 활자들은 극대화되고, 업태를 추호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친절한 그림이 동반되는 대다수의 간판들은, 이러한 배려의 산물이다. 게다가 값비싼 전기세를 무릅쓰며 간판의 형광등 숫자를 배가하는 이유는, 하릴없이 배회하는 무심한 이들에게도, 이 불빛의 세례를 피할 수 없게 하여, 이 유익한 정보를 공유케 하려는 가상한 노력이 배어 있는 것이다.
“삼선교”의 예가 우리 도시에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친절한 노력이 여전히 그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이러한 친절함은 때때로 예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근시안적인 시각과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중요한 덕행의 하나일 수 있으니 차치하더라도, 월말에 어김없이 날아오는 카드회사의 변제요구는 때때로 중대한 시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판이 이렇게 과장과 호도를 이용하여 우리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한다면, 일부 사람들이 이마에 달고 다니는 또 다른 간판은 그 크기로 승부하려 하지 않는다. 작으면 작을수록,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위력은 배가된다.
특정학교, 특정한 직업, 더 나아가 출신지역(본인들의 선택권이 전혀 없는 이 항목이 선거 때마다 우리사회의 대사를 가르는 중대한 요소로 부각되는 점은, 그 감정적 기저로 인해, 가장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이다)의 위력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과 그 희소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를 “우선”했지만 그래도 약간은 충청지역의 표를 의식해 급조된 행정복합도시가, 예상했던 대로 복합적이기보다는 복잡하기만 할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행정부의 이전을 약속했던 이들의 입에서, 여전히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위 기관들의 이전은 어불성설이고, 대신 그에 상당하는 기관들의 이전을 계획한단다.
몇몇 재벌그룹의 계열사 이전을 제외한다면, 그 계획의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가 특정대학교의 한 단과대학의 이전이란다. 이 대학의 한 단과대학이 10여개의 행정부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오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정말로 그들은 몇 백 개의 일자리와 몇 백 명의 일류대학생들의 존재가 실망한 주민들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