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한 사내가 살해당한다. 수사팀은 이 사건이 14년 전 발생한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파악하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 한동수를 찾아간다. 동수는 당시 피해자의 아들이었던 요한이 사건과 연루돼 있음을 직감한다. 한편 재벌총수와 결혼을 꿈꾸는 미호. 그녀에게서 석연찮은 과거가 발견되기 시작하고, 그 배후에 요한이 있음이 드러난다.
빛과 어둠을 강렬하게 대비시킨 첫 장면은 두 주인공 남녀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빛을 욕망하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위해 기꺼이 그녀의 그림자가 된 사내. 영화는 이 미스테리한 남녀의 과거와 현재를 숨 가쁘게 오가며 실체를 추적한다.
“도대체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하고 묻는 형사 동수의 독백, 여기에 제목의 ‘백야’를 잇대면 스토리의 윤곽이 드러난다. 밤이되 밤이 아닌 ‘백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은 빛의 여자와 어둠의 사내가 하나임을 상징한다. 마치 등을 마주 댄 샴쌍둥이처럼. 도대체 14년 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자와 사내는 한 몸으로 묶인 걸까. “태양이 높이 뜨면 그림자는 사라진다”는 요한의 마지막 대사는 강한 울림을 전한다.
‘백야행’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은 물론 일본에서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져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신인 박신우 감독은 이 익숙함을 ‘영화적’ 새로움으로 바꿔놓으려 꽤 공을 들였다. 그 결과는? 일단 합격점을 줄 만하다.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건 캐스팅이다. ‘백야행’을 국내에서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손예진과 고수는 네티즌이 기대한 캐스팅 1순위였다. 네티즌의 눈은 역시 정확했다.
손예진은 팜므파탈(남성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매력적인 여자)과 순수를 동시에 간직한 배우다. 겉보기엔 미술교사이자 패션숍을 오픈하는 디자이너지만 그 이면에 어둠의 독기가 스멀거리는 미호와 잘 맞아떨어진다.
고수가 연기한 요한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미호를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 고수는 요한이 되기 위해 과거 드라마 ‘피아노’에서 보여줬던 어두운 반항아적 기질을 한층 숙성시켰다.
손예진과 고수는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대사 없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처연한 사랑을 드러낸다. 다만 지나친 감정 절제와 사랑을 위한 살인이라는 행위를 관객들이 얼마나 편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영화는 원작에서 비중이 작던 형사 캐릭터를 대폭 키워 미호와 요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긴다. 원작이나 드라마를 접하지 못한 관객이 해석하느라 골치썩일 필요 없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 영리한 선택이다. 좀 더 폭넓은 관객을 소구하려는 승부수로 이해할 만하다. 한석규는 이 한물간 형사를 거친 짐승처럼 연기하며, 눈 아래 흉터와 거친 신음 소리, 한탄 등등으로 극 전반의 감정을 조율하는 연기내공을 발휘한다.
그러나 방대한 분량을 135분 러닝타임에 압축하면서 원작의 디테일을 잃어버린 건 아쉽다. 특히 한없이 어둠으로 침잠하는 요한의 사연을 많이 걷어냈다. 원작의 깊이도 파고들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장애물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했던 미호의 깊음 슬픔과 절박함, 그녀에게 요한이 바치는 헌신의 밑바닥에 깔린 깊은 절망은 분노와 두려움 정도로만 표현된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는 법. 둘이되 하나였던 여자와 사내.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호와 요한 둘 모두 밝은 태양 아래서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원작에 담긴 깊은 절망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진 못한다.
소설 읽기의 느낌을 영상에 그대로 옮기려 한 감독의 고집 탓에 미학적 완성도에 비해 긴장감도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원작의 소름끼치는 악녀, ‘유키호’를 생각하고 갔다간 실망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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