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철 작가 |
아, 남 몰래 들켜버린 짝사랑의 수치심, 나는 아랫도리 가리느라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놓칠 수도 없었고 잡을 수도 없었다. 상갓집 따순 화톳불이 거대한 절벽처럼 까마득하게 가로막는 것이다. 그가 움직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다가 그가 돌아서면 나도 재빨리 외면한 척 돌아서면서 연신 그렇게 그림자처럼 좇아붙길 몇 차례 반복했다. 소심증 사내는 돌린 등으로 연신 입술만 옹물며 아픈 문장 삭이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칼을 받으세요.'
그 문장 땅 속에 묻고 꽁꽁 다지는 중인데 감나무 가쟁이로 초승달만 희뿌옇게 걸려 있었다. `비수로 정확히 심장을 겨누리라' 그 결심은 동이 텄으므로 신데렐라 호박마차로 변했고 늦깎이 첫사랑 고백은 결국 그림자 밟기로 끝나버렸다. 날이 훌러덩 밝을 때까지 눈인사 트지 못했고 때까치 한 마리 전깃줄로 깍깍 날개 치면서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된 사내의 울분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10년 뒤 그도 죽었다.
선생의 죽음 이후 마을 사람들의 놀라움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우선 그냥 평범한 촌로인줄만 알았었는데 사방에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 때문에 놀랐단다. 다음으로 망자의 초상화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문상객들의 얼굴에 번지는 지식인 눈빛(지식인 중에도 드물게 진짜가 있다)의 진정성 때문에 놀랐더란다. 그리고 망자의 유언인, 이 땅의 결식아들과 북녘땅 어린이들에게 전달해주라는 성금의 정체성에 놀라기도 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가난한 촌로로 여겼던 게 당연했다. 그의 방안 책꽂이만 세월 따라 꽉꽉 채워졌을 뿐 오두막의 형체는 뭐 담벼락이나 벽돌 하나 변한 게 없었던 것이다.
거품으로 떠난 지 두 해, 자본주의 약진 속에 그가 혼신으로 잡고 싶었던 유토피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구였을까. 일제 강점기부터 한 평생 폐병과 동반한 작가 권정생이 사랑했던 사람은? 거미줄처럼 음습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희망과 사랑과 행복을 테마로 엮어내는 삶의 투영이 놀랍도록 으스스하다. 그가 영원히 도깨비불로 사라져버렸으므로 비로소 안도하면서, 분하다, 날마다 손등 찍는 것이다.
휴일의 새벽, 양철지붕으로 실로폰처럼 떨어지는 진눈깨비 소리 들으며 엎드려 읽던 동화책 세상, 빈 툇마루에 풋살구 한 바가지 슬그머니 얹어놓고 떠나시는 이웃집 아낙네 떠올리듯 노처럼 그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신기루 세상 강철 같은 희망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마른 살비듬 털어내고 부둥켜안는다. 나무를 심어본 사람만이 부은 팔뚝에서 흐르는 따사함을 껴안을 수 있다.
자본에 익숙한 벗들은 그늘 속에 피어나는 노란 순의 의미를 만나지 못한다. 작별의 자리에서 그네들의 눈빛을 씹고 또 삭여본다. 권정생을 꿰뚫어본 저 벗들의 서늘했던 눈빛들이 아름답다. 이제 스크럼 풀고 `등 푸른 생선'으로 헤엄치리라. 나목들의 초겨울, 깍찌 낀 손 찰떡처럼 끌안은 채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 아, 시리도록 푸른 하늘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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