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1. 비상하려는 봉황의 꿈, 백제금동대향로
2.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남겨진 백제인의 흔적
3. 서산마애삼존불과 백제인의 미소
4. 부여 정림사와 뤄양 영녕사 소조상
5. 사비도성과 난징(南京)의 건강성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7. 백제 유민들의 흔적
8. 백제문화 탐구의 새로운 모색
9. 사진으로 보는 중국속의 백제문화
10. 시리즈를 마치며
5. 사비도성과 난징(南京)의 건강성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을 비롯해 웅진(공주)과 사비(부여) 등은 한결같이 강을 끼고 도성을 축조했다. 이처럼 강을 끼고 도성을 조성함에 따라 수로는 하이웨이 역할을 함으로써 이동에 편리하도록 설계됐다.
▲ 백제의 사비도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시설인 사비 나성 가운데 하나인 동나성의 복원된 모습(위사진)과 중국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공원으로 변한 석두성. |
그러나 중국 남조 또는 북조의 도성이 장방형의 인위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사비 나성의 경우 산과 들의 형상을 이용한 자연친화적이라는 점에서 백제 고유의 형태를 갖췄다는 지적이다. 부여 나성의 특징과 건강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도성의 특징 등을 살펴보는 한편 이를 통해 향후 학계의 연구 과제가 무엇인가 알아보자.
▲물줄기와 사찰로 둘러싸인 건강성=고대 건업(建業) 즉, 오늘날의 난징은 동진(東晋)을 비롯해 남조의 송(宋)· 제(齊)·양(梁)·진(陳) 등 모든 왕조의 수도로 300여 년간 이어졌으며 건강성을 중심으로 남방의 정치와 문화가 발전해나갔다. 특히 오나라가 건강에 도읍한 이후 건강은 육조시대 남방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됐다.
서쪽과 북쪽은 양자강이 둘러싸고 외성인 석두성(石頭城)이 서쪽의 방어선 역할을 했다. 또 궁성의 서남쪽으로 지방정부 기능을 맡아보던 서주성(西州城)이 위치했다. 동쪽으로는 종산(鐘山)이, 북쪽에는 막부산(幕府山)이 에워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지역이다. 이는 백마강이 서·남·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부여와 지형적으로 다소 유사하다. 건강 궁성과 이어지는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도시가 형성됐었다. 건강성은 정남쪽 방향이 아닌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진 정남서쪽을 향했다.
육조시대 건강의 범위는 사방 20리 즉 8km에 달할 정도로 주변지역을 포함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건강의 도성과 궁성은 새롭게 확대돼 남조의 최전성기로 평가되는 양나라 때는 28만호, 즉 100만 명이 넘는 백성이 성안에 거주할 정도로 거대 도시였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난징시박물관은 건강궁성과 관련된 조사에서 육조시대 도로 유적을 발굴했다. 그 가운데 현재의 난징도서관 신관 지하에는 그 당시의 도로 유적과 배수구의 흔적들을 발굴현장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다. 육조시대 당시의 건강궁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벽돌을 세로로 세워 깔아 조성했으며 도로 옆에는 하수도를 조성, 빗물 등이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건강 궁성과 도성 주위는 강과 하천 등 수로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방어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건강 도성의 서쪽 수로는 인공적으로 만들 정도다. 난징도서관에는 양나라 때 백제사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양직공도'가 재현돼 벽에 걸려있다.
난징사범대 주유흥 교수는 “건강성이 육조의 도성이기 때문에 백제 도성과도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뿐만 아니라 건강성 주위에 많은 사찰이 조성돼 있어 당시 불교문화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부여 주변에도 절이 많은 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중국 난징도서관에 전시중인 백제 사신의 모습인 양직공도. |
석두성의 아랫부분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양자강 물이 이곳에 부딪쳐 생긴 침식작용의 흔적들이다. 지금은 양자강이 밀려가면서 호수만 남아있는 상태다. 석두성 위로는 산책로와 봉화대가 조성돼 있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석두성 공원에 나와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연인과 함께 산책로를 거닐기도 한다. 지난 1975년 난징을 방문한 김일성이 등소평과 함께 석두성을 둘러볼 정도로 명성을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석두성 인근에 양자강으로 이어지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사비 나성=사비 나성은 부소산성과 함께 백제의 사비도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의 하나다. 도시공간 전체를 외곽으로 둘러싼 새로운 형태의 도성제는 부여를 도성으로 했던 6세기 중엽경의 백제 도성제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서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난징의 건강성은 대성(大城) 개념의 성곽이며 외곽에 대나무울타리로 방어시설을 구축했다”며 “고대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나성이라는 외곽을 갖춘, 완비된 형태의 도성제 효시가 바로 사비 나성”이라고 강조했다.
사비 나성은 이 같은 중요성으로 인해 지난 1963년에 사적 제 58호로 지정됐으며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91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펼쳐졌으나 일부는 유구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나성의 구조에 대한 학자들의 학설이 분분하다.
지난 1981년 홍재선은 나성의 구조를 부소산성의 북쪽에서 쌍북리의 청산성을 연결하는 북나성을 비롯해 동나성, 서나성, 남나성 등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능산리 고분군 서편 능선~필서봉~염창리의 백마강변에 이르는 동나성. 부소산성 서편에서 시작돼 구교리 능선~동남리 · 군수리의 백마강 자연제방 등으로 이어지는 서나성. 궁남지 동남편의 중정리~왕포리 사이에 동서로 잇는 남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난징박물관에 전시중인 건강성 도로유적. |
그러나 이 같은 주장과는 달리 일부 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부소산성의 북쪽에서 청산성을 연결하는 0.9km 구간의 북나성과 청산성~능산리 북쪽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꺾여 백마강과 왕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는 5.4km의 동나성 등 총 연장 6.3km의 반월형 사비 나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나성과 남나성은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축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나성의 축조 시기 또한 학자들 사이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동성왕대에 조성했다는 견해와 함께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할 당시인 538년경에 사비 나성을 쌓았다는 주장이 공존하는 실정이다.
한밭대 심정보 교수는 “사비도성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평양성보다도 앞선 시기인 동성왕때 건립됐을 뿐 아니라 4각형 즉 장방형의 형태를 띤 중국의 건강성과 달리 산과 들의 형태에 맞춘 자연친화적 성격을 갖추고 있는, 백제만의 독창적인 도성”이라고 강조했다.
자연친화적이며 지극히 백제적인 나성이 바로 부여 나성인 것이다. 이에 따라 학계의 보다 적극적인 발굴 조사 및 연구가 요구됨은 물론 이를위해 해당 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사비 나성을 친화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 마련도 검토돼야 한다는 지적 또한 높다. /난징=글 박기성·사진 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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