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상하려는 봉황의 꿈, 백제금동대향로
2.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남겨진 백제인의 흔적
3. 서산마애삼존불과 백제인의 미소
4. 부여 정림사(定林寺)와 뤄양(洛陽) 영녕사(永寧寺) 소조상
5. 사비도성과 난징(南京)의 건강성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7. 백제 유민들의 흔적
8. 백제문화 탐구의 새로운 모색
9. 사진으로 보는 중국속의 백제문화
10. 시리즈를 마치며
정림사지 및 영녕사 소조상에 대해 살펴보기 앞서 도용이라는 명칭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자. 고고학자인 윤무병 전 충남대교수는 도용이란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도용이라고 이름 한 유물들은 흙으로 빚어서 구워 낸 인형을 의미하는데 토우(土偶) 또는 니상(泥像)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중국학자들의 용어사례에 따라 도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이병호 학예연구관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중국학계에서 흔히들 부르는 도용은 모두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림사지는 무덤이 아닌 절터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된 소형의 소조상들을 도용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중국 도용의 다양한 형태=소조상과 도용은 흙으로 빚어낸 유물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됐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 모양이나 재질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소조상을 논할 때 도용을 빼놓을 수 없다. 정림사지 소조상과 흡사한 것들은 중국의 도용에서도 그 형태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서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 뒤 위를 건립하고 뤄양을 수도로 정했다. 이후 서기 265년 사마염이 위정권을 빼앗고 진(晉)나라를 건립했는데 뤄양을 수도로 삼고 서진이라 칭했다. 동한, 조위, 서진, 북위 등 4조가 뤄양을 수도로 정해 이 기간만도 334년에 달한다.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의 도읍지였던 뤄양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역사인식은 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뤄양에서는 끊임없는 발굴조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북위시대(서기 386~534년) 묘장의 경우 원소묘를 비롯해 원괴묘, 원차묘, 후장묘, 양화묘, 양기묘 등에서 독특한 풍격의 도용이 발굴됐다. 이들 도용 가운데는 진묘용을 비롯해 출행의장용, 남녀시중용, 주방에서 일하는 도용 등등 북위 선비족과 중원문화가 융합된, 당시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은 표현양식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시기의 도용들은 북위 영녕사탑지에서 발굴된 채색화 토기상과 맥을 함께하고 있어 눈 여겨 봐야 할 대상이다. 북위 때 만들어진 `채회농관용(彩繪籠冠俑)'은 높이 18.8㎝로 몸과 머리를 따로 모형을 만들어 합친 것이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넓은 소매의 옷과 주름치마를 입었다. 오른 팔은 치마를 반쯤 들고 치마 끝은 팔꿈치에 껴있고 오른손은 수건을 쥐고 일어선 자세다. 눈썹, 눈, 관, 신발은 검은 색이며 옷과 치마는 붉은 색에 흰색을 끝에 박았다. 난징시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도여용(陶女俑)'은 남조 때의 것으로 지난 1972년 난징시 영산묘에서 출토됐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얼굴은 풍만하나 투박한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단조롭기까지 하다. 치마는 넓게 펴서 발이 보이지 않고 바닥에 닿았다. 이 시기 남조의 도용에서는 이 같은 투박함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북위의 영녕사 소조상에서 드러나는 가늘고 굵은 음각문양의 표현과 이에 따른 생동감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1979년 영녕사탑지에서 출토된 소조상편은 총 1560여점에 달한다. 이들 소조상은 조형이 우아하고 색이 정교하며 그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기예를 물씬 담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북위 때 제작된 부서진 얼굴 소조상인 `니소면상(泥塑面像)'이다. 통통한 얼굴에 콧날이 오똑하며 입가는 위로 살짝 올라갔다. 두툼하지도, 얇지도 않은, 살짝 다문 입술은 부처의 온화함과 자상함을 고스란히 담은 듯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 학자들은 이 소조상을 영녕사 발굴 유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고 있다. 영녕사는 당시 황가의 사원인데 이 소조상은 사원탑지에서 출토된 채색소조상으로 중국학자들에게 예술진품으로 불리고 있다. `니소대관두상(泥塑帶冠頭像)'은 머리에 관을 쓰고 두 눈은 가늘고 길며 위로 올라간 형상이다. 유난히 큰 귀와 함께 주름진 얼굴 형상은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인의 모습이다. `니소시종상(泥塑侍從像)'은 머리 부분은 소실된 상태인데 높이가 약 15㎝에 불과하다. 긴 치마는 바닥에 끌리고 옷은 가볍게 바람에 날리는 듯 또는 한쪽으로 끌리는 듯 생생한 율동감을 담고 있다.
옷 속에 감춰진 몸매는 가늘고 길며 속옷과 겉옷의 가늘고 굵은 음각문양은 살포시 걸어가는 고대여인의 자태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출토된 소조상은 뤄양박물관에 전시중인데 고대 중국 그 어느 시기의 출토품에 비해 예술성과 생동감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소조불상과 흡사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이 같은 점은 당시 백제-중국 간의 문화교류를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나 정림사지 출토 유물의 근간을 북위시대 영녕사에만 국한시키기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남조 소조상과의 연관성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난징시박물관 왕지고(王志高)씨는 얼마 전 부여에서 열린 `동아시아국제학술포럼'에서 `남경 홍토교 출토 남조 소조상과의 연관문제'라는 글을 통해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과 남조의 연관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02년 발견된, 남조 동진 때의 사찰인 연흥사(延興寺) 관련 유물은 불교사찰에서의 소조상의 제작기법 및 남조 불교문화가 한반도 백제에 끼친 영향 등을 연구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는 것이다.
그는 정림사 금당의 후면에는 강당이 배치돼 있으나 영녕사에서는 금당 뒤쪽에 강당이 설치된 예가 보이지 않아 정림사는 남조 불교사찰을 모방해 건립한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정림사라는 사찰명이 남조 도성 건강성의 종산에 입지한 사찰 정림사를 모방한 것이라며 그러므로 양자 간의 소조상 예술조형은 기원처가 같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판단된다는 지적이다.
▲정림사의 소조상=정림사지는 부여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백제 사비시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지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시행된 정림사지 발굴작업에서는 100여편 이상의 소조불상이 출토됐다. 서쪽 회랑지의 남쪽 귀퉁이에 위치한 남북으로 긴 구덩이에서 수많은 기와편이 소조불상과 함께 출토됐는데 학계에서는 정림사가 화재 등으로 소실된 이후 이곳에 다시 사찰을 경영하면서 이 구덩이에 폐기물을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소조불상들은 대부분 파편이며 머리 부분 이외에는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불두 A'의 경우 뭉툭한 코에 작은 입술이 위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다. 다소 큰 듯한 눈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뚜렷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다. 농관(籠冠)을 쓴 수부(首部)의 경우 북위의 도용인 `채회농관용(彩繪籠冠俑)'이나 남조 때의 `도여용(陶女俑)'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다. 영녕사 소조상이 예술성과 생동감을 지닌 것에 비해 정림사지 소조상의 경우 별다른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이병호 학예연구관은 “중국으로부터 이제 막 들어온 제작 기술이 영녕사와 같은 수준의 불상을 만들 수 있었겠냐”며 “영녕사 불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제작기법에서도 영녕사 소조상이 불에 굽지 않는 것에 비해 정림사지 소조상의 경우 불에 굽는 기법 등에서 서로 다르다는 지적이다. 정림사지 소조상의 이 같은 제작기법은 오히려 남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527년 남조의 양나라 황제를 위해 웅진에 대통사(大通寺)를 건립한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도 기술자와 화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양나라는 이에 허락했다는 것이다. 백제와 양나라의 밀접한 교류는 정림사지 소조상과도 연관이 깊을 수 있으며 이는 향후 학계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과제인 것이다./뤄양·난징=글 박기성·사진 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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