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 |
수업 종료 5분전. 아이들이 주말에 백화산 등산을 하고 싶은데 선생님 시간 있냐고 묻는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든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야간자율학습을 지도하고 내려와 보니 책상위에 예쁜 글씨체로 등산 날짜와 시간, 함께 갈 사람의 이름과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이 적힌 메모지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백화산에 어느새 가을이 한창이다.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산이지만, 길 곳곳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억새가 하얗게 날리고, 도토리가 떨어지고 작은 참나무 이파리들에 단풍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만 생각했던 등반이 생각만큼 쉽질 않다.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 힘이 든 데다가 나보다 키도 크고 젊은 녀석들이라 걸음도 빠르다. 학급 친구들 이야기, 진로에 대한 이야기, 수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를 넘었다.
이제 두 고개만 넘으면 된다. 네 번째 고개가 유난히 힘이 든데 여학생 한 명이 더는 못가겠다고 이제는 울어버린다. 바위에 걸터앉아 긴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재작년에 가르친 녀석의 동생이란다. 그동안 내가 너무 형식적으로 학생들을 대했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뜨끔했다. 마지막 고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바위 앞에서 녀석이 또 포기하려고 한다.
자기들끼리 앞에 가던 녀석 중 한 녀석이 슬그머니 뒤에 처져서 우릴 기다려 준다. 속이 깊은 녀석이다. 학교에서 볼 때는 `왜 공부를 안 할까? 멀쩡하게 잘 생긴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웬 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근데 녀석이 멋지다. 내가 뒤처지고 여자 친구가 뒤처지니까 기다려주고, 손을 내밀어 끌어주기도 한다. 정상에서 서로 준비해온 점심을 펼쳐놓는데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또 뭉클한다.
도시 아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순박함이 있다. 몸이 아파서 못 온 녀석이 주고 갔다는 과일도시락, 김밥을 준비한 녀석도 초밥을 준비한 녀석도 손이 어찌나 큰 지 도시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거기다가 나는 녀석들이 좀 많이 먹을까 싶어서 인원수의 2배만큼 샌드위치를 사왔다. 풍성한 도시락이 아이들의 사랑 같아 더 기쁜 점심시간, 아이들이 또 한 번 나를 감동시킨다. `선생님 먹을 것이 많은데 주변에 계신 분들하고 나누어 먹어도 될까요?' 하고 묻는다.
다른 사람과 나눌 줄 아는 마음, 뒤에 오는 친구를 배려하는 따뜻함, 함께 가기로 해놓고 못 가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에 보낸 도시락. 세상에 이런 행복한 점심시간이 또 있을까? 교실에서의 수업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 백화산에 함께 오르면서 겪고 느끼는 것들이 교사인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 아이들이 백화산 정상의 저 나무들처럼 사람들에게 그늘을 줄 수 있는 사람들로 컸으면 좋겠다. 짊어지고 갔던 점심을 먹어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 내 발걸음도 가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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