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진]백화산 등산과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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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백화산 등산과 도시락

[교육단상]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

  • 승인 2009-12-28 15:01
  • 신문게재 2009-11-11 20면
  • 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
학교에서 20년째 국어를 가르치면서 국어 수업은 학생들이 열심히 말하고 쓰고 읽고 하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오고 있다. 그래서 내 수업은 늘 시끌벅적하다. 오늘도 아이들은 시끄럽다. 무슨 이야기로 선생님의 관심을 끌어 진도를 안 나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정말 열심히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 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
▲ 이희진 태안 만리포고 교사
근데 오늘 화제 중 조금 색다른 화제가 있다. 주말에 백화산에 가시냐고 묻는다. 어째 반갑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인데 뜬금없는 질문이다. 일단은 진도를 나가고 오늘 수업 목표를 달성한 후에 이야기하자고 매몰차게 끊었다.

수업 종료 5분전. 아이들이 주말에 백화산 등산을 하고 싶은데 선생님 시간 있냐고 묻는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든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야간자율학습을 지도하고 내려와 보니 책상위에 예쁜 글씨체로 등산 날짜와 시간, 함께 갈 사람의 이름과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이 적힌 메모지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백화산에 어느새 가을이 한창이다.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산이지만, 길 곳곳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억새가 하얗게 날리고, 도토리가 떨어지고 작은 참나무 이파리들에 단풍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만 생각했던 등반이 생각만큼 쉽질 않다.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아 힘이 든 데다가 나보다 키도 크고 젊은 녀석들이라 걸음도 빠르다. 학급 친구들 이야기, 진로에 대한 이야기, 수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를 넘었다.

이제 두 고개만 넘으면 된다. 네 번째 고개가 유난히 힘이 든데 여학생 한 명이 더는 못가겠다고 이제는 울어버린다. 바위에 걸터앉아 긴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재작년에 가르친 녀석의 동생이란다. 그동안 내가 너무 형식적으로 학생들을 대했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뜨끔했다. 마지막 고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바위 앞에서 녀석이 또 포기하려고 한다.

자기들끼리 앞에 가던 녀석 중 한 녀석이 슬그머니 뒤에 처져서 우릴 기다려 준다. 속이 깊은 녀석이다. 학교에서 볼 때는 `왜 공부를 안 할까? 멀쩡하게 잘 생긴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웬 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근데 녀석이 멋지다. 내가 뒤처지고 여자 친구가 뒤처지니까 기다려주고, 손을 내밀어 끌어주기도 한다. 정상에서 서로 준비해온 점심을 펼쳐놓는데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또 뭉클한다.

도시 아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순박함이 있다. 몸이 아파서 못 온 녀석이 주고 갔다는 과일도시락, 김밥을 준비한 녀석도 초밥을 준비한 녀석도 손이 어찌나 큰 지 도시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거기다가 나는 녀석들이 좀 많이 먹을까 싶어서 인원수의 2배만큼 샌드위치를 사왔다. 풍성한 도시락이 아이들의 사랑 같아 더 기쁜 점심시간, 아이들이 또 한 번 나를 감동시킨다. `선생님 먹을 것이 많은데 주변에 계신 분들하고 나누어 먹어도 될까요?' 하고 묻는다.

다른 사람과 나눌 줄 아는 마음, 뒤에 오는 친구를 배려하는 따뜻함, 함께 가기로 해놓고 못 가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에 보낸 도시락. 세상에 이런 행복한 점심시간이 또 있을까? 교실에서의 수업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 백화산에 함께 오르면서 겪고 느끼는 것들이 교사인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 아이들이 백화산 정상의 저 나무들처럼 사람들에게 그늘을 줄 수 있는 사람들로 컸으면 좋겠다. 짊어지고 갔던 점심을 먹어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 내 발걸음도 가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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