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상하려는 봉황의 꿈, 백제금동대향로
2.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남겨진 백제인의 흔적
3. 서산마애삼존불과 백제인의 미소
4. 부여 정림사의 소조불과 영령사의 도용
5. 사비도성과 난징(南京)의 건강성
6. 무령왕릉속의 독창적 문화인
7. 백제 유민들의 흔적
8. 백제문화 탐구의 새로운 모색
9. 사진으로 보는 중국속의 백제문화
10. 시리즈를 마치며
▲백제에 전파된 불교=불교가 백제에 전파된 것은 침류왕 원년(384)에 남조인 동진(東晋)으로부터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계속되는 압력을 피하기 위해 475년에 서울을 웅진으로 옮겼으며 무령왕대에 이르러서야 정국의 안정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사비시대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사비시대 성왕 때 이르러 불교의 융성과 함께 사찰도 많이 세워졌다. 사비시대 부여는 부소산 남쪽에 궁궐을 마련하고 외곽에 나성을 쌓아 본격적인 도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 당시 불교의 융성과 함께 정림사(定林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표적인 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중국 전파와 불상의 시대적 변천=불교 및 불교문화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은 양한(兩漢)시대(기원전 202~220년)이다. 이후 위진남북조시기에는 불교 조각 예술부문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와 룽먼석굴(龍門石窟)을 비롯해 둔황(敦煌), 윈강(雲岡) 등 석굴 불상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보는 상하이(上海)박물관에 소장된 불상을 중심으로 중국 불상의 시대적인 변천을 살펴봤다.
북위(386~534년)시대 불상은 전통적인 기초 하에 서방의 풍격을 흡수하고 융합해 유연하고 독특하며 준수한 형상을 나타낸다. 북제와 수나라시대 불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외양과 정신을 겸비했으며 점차 서방의 영향을 버리고 중국화 하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갔다.
당대 때 불상은 조각 예술의 최고봉으로 중국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불교조각을 비롯해 능묘조각 등 사실적인 측면을 기초로 우아하고 웅장하며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후세에 남겼다. 먼저 위진남북조수대(魏晉南北朝隨代, 220년~ 618년)의 불상을 살펴보자. 북위 전기불상은 간다라불교 예술의 영향을 받아 눈이 들어가고 콧등이 높으며 형체가 거대하다.
또한 걸쳐진 옷의 주름이 깊고 소매가 크며 넓은 띠를 한 자연스러운 모양이 특징적이다. 북위 통치자는 한족문화정책을 추진하고 불교를 숭상했으며 남북예술을 융합하려 노력했다. 이 시대 불교 조각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석비(石碑)다. 석비는 위진남북조시기에 대중적이며 독창적인 수단으로 표현됐다. 불교도들은 석비 자금 조달을 통해 영적인 덕을 쌓았다.
북위 때 만들어진 `왕용생등조불상석비(王龍生等造佛像石碑)'에는 석비 조성에 협조한 사람들의 이름을 비롯해 부처와 보살상, 두 마리 사자상 및 한 왕조 건축물 등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사자의 경우 외국 사신들이 들어올 때 가져온 황제 선물이다. 불교조각물에서 사자는 짐승의 왕이다. 이 석비에서는 인도불교가 한 왕조의 중국적 미적 감각에 동화됐음을 한 왕조의 건축물, 말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북제(550년~577년)시대 조형은 신체가 가늘고 우아하다. 또 옷은 가볍고 부드러우며 선은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은 그 당시의 전형적인 풍격이다. 북제 때 반가사유상인 `도상조태자석상(道常造太子石像)'은 얼굴 부위가 파손되긴 했어도 당시의 불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수나라시대(581~618년) 불상은 기본적으로 북제 풍격의 연장이다.
수나라 대표적 불상의 하나인 `아미타불삼존동상(阿彌陀佛三尊銅像)'은 대좌위에 조성됐는데 7동상으로 꾸며졌다.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양 옆의 보살의 목걸이 장식품들이 우아한 선으로 자연스럽게 드리워져 있다. 당시에 제작된 청동조각물로 남겨진 3개 가운데 하나인데 섬세하게 다루어진 인물상은 수 왕조 예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보살의 목걸이 장식품 및 머리에 쓴 화관의 장식이 화려하고 섬세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어 당대의 불상은 형체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부처의 형체가 우아하고 몸매는 균형이 잡혔다. 많은 조각형상은 애써 중생의 모습을 천도해 불가로 새겨서 점점 세속화됨을 알 수 있다. 룽먼석굴연구소 양초걸(楊超傑)씨는 “북위 때 조성된 불상의 경우 대개 규모가 큰데 외견상 여위어 보인다. 이는 옷을 많이 입은 듯 불상을 조성했기 때문이며 이와는 달리 당나라 시기의 불상은 옷을 두껍게 입지 않은 듯 해 얼굴이 통통해 보인다”고 말했다.
▲미소 가득한 백제의 부처=흔히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상은 국보 제 84호로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을 띠고 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있는 여래입상은 얼굴이 통통하며 반원형의 눈썹,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얼굴의 미소와 함께 얼굴 윤곽이 둥굴고 풍만해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 대의를 입었으며 옷이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이 단조롭게 반복돼 있다. 둥근 머리 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 보살입상 역시 얼굴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으며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굴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흔히 삼존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같은 형식의 보살상이 표현되나 이 경우는 한쪽에는 보살입상이, 반대편에는 반가사유상 보살상이 배치된 다소 특이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홍익대 김리나 명예교수는 “백제 때 가장 널리 신앙되었던 보살상 형식으로 표현했을 것”이라며 “내용상 본존은 아미타불을,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상을 표현한 것으로 백제 고유의 배치를 나타낸 것 같다”고 추정했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전문가들은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황수영 전 동국대총장은 자신의 저서 `한국 불교의 연구'라는 책에서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조성연대는 600년경 삼국시대 말기로 추정되며 이 삼존불은 양식상 중국남북조 특히 그 말기의 영향을 많이 보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한국미술사연구소 문명대 소장(동국대 명예교수)은 제작연대와 관련 “북제 말기부터 수나라까지의 불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그 어느 백제의 불상보다도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자비롭게 웃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명대 소장은 “서산마애불은 양나라 등 중국 남조의 영향까지 받은 불상으로 보이는데 백제화가 많이 된 불상”이라고 전제 한 후 “얼굴 표정이 한국적으로 부드러워졌으며 이 같은 웃는 모습은 인간적이고 친근한 인상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백제 불상을 대표한다”고 강조했다. /상하이(上海)=글·박기성·사진=김상구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