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조성된 불상만 11만개에 달하니 불교신도들에게는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아울러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혹 불교신도가 아닐 지라도 그 웅장함에 쉽게 빠져드는 곳이기도 하다. 룽먼석굴에는 백제인과 신라인이 조성한 불상이 있어 국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과거 1300여 년 전 백제인과 신라인이 조성했다는 불상이니 일반인들에게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일반 관광객들은 불상이 조성돼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기가 쉽지 않다. 이에 본보는 룽먼석굴에 새겨진 부여씨(扶餘氏) 불상 2구를 비롯해 신라인이 조성해놓은 ‘신라상감(新羅像龕)’ 등을 취재했다.
특히 중국측이 지난 1991년 2000여개에 달하는 룽먼석굴 감실에 대한 번호부여 작업을 완성한 후 1994년 제작한 약도 책자인 ‘룽먼석굴굴감편호도책((龍門石窟窟龕編 圖冊)’을 입수,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독자들이 부여씨 불상 및 신라상감의 위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약도화 했다.
▲ 룽먼석굴을 찾은 관광객들. 중국 현지인은 물론 외국인관광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
▲멸망국 여인, 부여씨의 꿈=룽먼석굴의 웅장함에 빠져 여기저기 발길을 옮기다가 부여씨가 조성한 석불을 찾아 그 앞에 서면 석불의 작은 규모에 말문이 턱 막힌다. 877호굴 바로 왼쪽 벽면에 조성된 석불 2구는 높이가 불과 10cm 안팎이라 잘 살펴봐야 그나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것도 위치를 모르면 찾을 수조차 없다. 규모가 너무 작아 아예 석불의 번호 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부여씨가 조성한 석불은 2개의 좌불(坐佛)이다. 불상 밑에는 조성비문이 두 줄로, 위에서 아래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모두 12글자가 새겨져있다. 조성된 후 오랜 세월이 흘러간 탓에 비문은 뚜렷하지 않은 상태다.
‘ 兩 敬 餘 妻 郞 一
區 造 氏 扶 將 文 ’
일문랑장(一文郞將) 처(妻) 부여씨(扶餘氏) 경조양구(敬造兩區). 즉, ‘랑장군의 처 부여씨가 부처님을 (진심으로) 믿어 불상 2구를 조성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록 조성된 비문은 짧지만 정확한 뜻풀이는 쉽지 않다. ‘일문(一文)’이란 글자가 이름인지 아니면 어떤 직책인지 학계에서는 여전히 정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국 뤄양문물화공작대 조진화씨는 최근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열린 ‘동아시아국제학술포럼’에 참석해 “부여씨가 백제의 기혼 여성 불교도이거나 혹은 고구려인 일문랑(一文郞)이 부인인 부여씨를 위해 만든 불감이라는 설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내외 학자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청계천문화관 김영관 관장은 “일문이란 글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알 수 없다”며 “다만 백제인이 불상을 조성했다는데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룽먼석굴 번호부여작업의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룽먼석굴연구소 전 소장인 유경용(劉景龍)씨는 “당나라 시기에 부처를 진심으로 믿는 부여씨의 여자가 불상 2개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여씨가 조성한 불상 역시 풀어야할 과제가 남겨져 있는 셈이다.
불상의 제작 시기와 관련해 ‘룽먼석굴 총록’이란 책의 지은이이며 룽먼석굴연구소의 양초걸(楊超傑)씨는 “백제가 멸망한 후 당 고종 시기인 680년 이후에 조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룽먼석굴과 관련된 도로를 개설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추정되는곽씨와 방씨를 기념하기 위해새겨진 곽공로(郭公路.사진 오른쪽)와 방공로(方公路.왼쪽)라는 글씨를 찾으면 부여씨 불상<빨간색 점선>을 보다 쉽게 찾을수 있다. |
▲통일신라의 흔적도 지금은 텅 빈 석굴뿐=신라인이 조성한 484호굴은 멸망국인 백제와는 달리 통일신라의 위상을 감안한 듯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석굴이다. 그러나 내부의 불상은 남아있지 않은 채 ‘신라상감(新羅像龕)’이란 글자만이 흐릿하게 외벽에 남아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글씨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다. 484호굴은 가로 세로 2m의 굴을 조성한 후 내부에만 모두 7개의 불상을 조성했다.
석굴 밖 좌우측에는 역사상(力士像)을 조성해 놓았으나 이것 역시 흔적뿐이다. 룽먼석굴측은 이곳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관광객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금지 팻말을 설치해 놓아 신라상감의 흔적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부여씨가 조성한 불상의 규모와 신라상감의 규모를 비교해볼 때 멸망국의 설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부여씨 불상 찾아보기=부여씨의 좌우측에는 당시 룽먼석굴과 관련된 도로를 개설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곽씨(郭氏)와 방씨(方氏)를 기념하기 위해 곽공로(郭公路) 와 방공로(方公路) 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때문에 일반인들이 부여씨의 불상을 찾아보려면 바로 부여씨 우측의 곽공로와 좌측의 방공로를 잘 살펴보면 된다. 그러나 이 글씨는 벽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찾아보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룽먼석굴측은 규모가 큰 석굴에 대해 작은 안내 표지판을 꾸며놓았다. 이 표지판에 의지해 부여씨를 찾고자 할 경우 712호굴 연화동(蓮花洞)과 1034호굴 보태동(普泰洞) 사이에서 곽공로나 방공로를 찾아 부여씨를 확인하면 된다.
▲ (왼쪽사진)부여씨 불상 약도(연필끝부분). (오른쪽사진)신라상감 약도(연필끝부분). |
북위시대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룽먼석굴은 동위를 거쳐 서위, 북제, 수, 당에서 송대까지, 연대적으로는 493년~907년까지 불상 11만개, 탑 78개를 조성했다. 불상 가운데 가장 큰 불상은 17.14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다. 북위 때 조성된 불상의 경우 대개 규모가 큰데 외견상 야위어 보인다.
이는 옷을 많이 입은 듯 불상을 조성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얼굴은 야위어 보인다. 이와는 달리 당나라 시기의 불상은 옷을 두껍게 입히지 않아 얼굴이 통통해 보인다. 룽먼석굴연구소 양초걸(楊超傑)씨는 “북위 때는 불상의 선을 중시해 옷을 많이 걸친 모습으로 아름답게 표현했으나 당나라 시기에는 몸을 많이 나타내려 통통하게 조성했다”고 말했다.
현재 남겨진 2000여점의 감실 가운데 높이가 30cm 이상이면 번호를 부여했는데 총 2345개의 감실에 번호가 부여됐다. 룽먼석굴에 대한 이 같은 정리작업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1954년 봄, ‘룽먼문물보관소’에서 추진된 번호작업은 2161번까지 지속됐으나 관련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이후 1962년 베이징(北京)대학에서 시험 삼아 이 작업을 했으며 1980년대 들어 ‘룽먼문물보관소’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번호 부여작업을 실시해 1991년 5월 번호작업을 완성했다.
룽먼석굴에 대한 중국측의 이 같은 노력은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이어졌으며 외국인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요 문화유산 관광지로 변모했다. 이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존, 발굴 및 관광사업으로까지 이어가야 할 정부는 물론 지자체 및 학계가 눈여겨봐야할 좋은 모델로 꼽히고 있다./뤄양 룽먼석굴 글=박기성.사진=김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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