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서 배재대 법대 학장 |
헌법재판소는 이번 결정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루어진, 그야말로 ‘법리’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도 법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상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이비’법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심각한 절차 위반도 법률안을 무효로 선언할 정도가 아니라니, 앞으로 국회에서 합리적 토론을 통한 입법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불법과 편법이 판치고, 날치기.대리투표.무제한재표결만이 횡행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모를 리 없는 헌법재판소가 “위법한 절차에 의한 입법도 유효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절차’라는 말이 타당하다면, 이제 헌법재판소는 한나라당과 함께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번 재판은 헌법재판소가 모처럼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다. 이번 사안의 위헌성은 너무나 심각하면서도 명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진정한 헌법수호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부정한 헌법 파괴 행위에 면죄부를 쥐어 줌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스스로의 존립기반을 허물고 말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한 헌법위반을 당당하게 위헌이라고 선언하는 곳일지니, 헌법재판소여, 이제 그만 그 간판을 내려라!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안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정되도록 만든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의원들이 헌법과 국회법이 정한 절차조차 무시한 채 일방적 통과를 밀어붙인 이번 사태는,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를 그토록 강조하던 이들이 스스로 위헌 위법에 앞장서서 입법절차를 유린한 것은, 법치주의의 부정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반란이었다. “권한침해는 인정, 법률안가결선포는 유효”라는 헌법재판소의 뒤틀린 결정은 이런 불법과 편법을 제도적으로 바로잡을 기회마저 날려 버렸지만, 이번 사태는 우리 정치와 사법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미디어법 자체이다.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이나 대리투표라는 극단적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를 고집한 이유를, 우리는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한나라당은 미디어법안의 처리에 당의 그리고 정권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미디어법이 발효되고 난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정부.여당의 입장에 어긋나는 정보는 더 이상 미디어를 통하여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고, 정권의 이해에 들어맞는 뉴스만이 언론을 통해 유포될 것이다. 국가?대기업?신문재벌이 지배하는 미디어를 통해 여론은 획일화되고, 사이비 여론을 등에 업은 세력들은 장기집권의 길을 열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디어법 통과에 목숨을 건 한나라당의 속내일 것이다. 이제 이런 의도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제가 우리 앞에 던져졌다.
하지만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 매우 고무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과거 날치기 통과되었지만 헌법재판소가 그 유효성을 인정했던 노동조합법은, 결국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폐지되고 새로운 입법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헌법재판소의 결정부터 대체입법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7개월이었다. 헌법재판소가 이번에 유효 선언한 미디어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입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국민들이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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