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을 돋우고 힘껏 목소리를 높여 전화기로 용건을 전달하면서 과연 대전의 의료기반에 대한 인터뷰가 가능할지 걱정이 앞섰다. 약속 잡기를 머뭇거리는 이 씨를 간신히 설득해 지난 26일 만났다. 전화통화와 달리 이 옹의 발음은 정확했으며 기자의 질문에 과거 기억도 뚜렷이 떠올렸다.
이 옹이 1960년 대전에 엑스레이 병원을 차릴 때만 해도 대전에 있는 병의원이라고는 몇 개 되지 않았단다. 한국전쟁 이후 기본시설이 복구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아직 전문적인 의료인력이 배출되지 않았던 때로 도립병원과 보건소 등 공공병의원은 손꼽을 정도였다.
“당시 중앙로 대전천 옆에 이안과가 있었고 대흥동엔 박외과 그리고 삼성동 시장통에는 시립 보건소가 있었지” 이 옹은 1960년대 대전시내의 병원이 있던 곳을 그림을 그리듯 설명해줬다.
“대부분 병의원은 중구와 동구 등 원도심에 집중돼 있던 때였지요. 그나마 종합 진료를 받으려면 충남도립병원이 전부였습니다”
특히 전반적으로 영향상태가 좋지 않던 당시 결핵 환자는 대전지역에서도 창궐했다고 한다.
이 옹은 깊은 기침과 피를 연일 쏟아내며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당시 엑스레이 촬영기를 갖춘 병원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이 씨의 병원에도 항상 환자들의 기침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검진 이후에 결핵으로 판명돼도 그때는 적당한 약이 없었으며 그나마 약값도 비싸 대부분 보신탕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게 치료의 전부였다고 설명해 줬다.
“당시엔 휴식을 취하며 자연치유가 되기를 바라거나 시골로 내려가거나 산중에서 보내는 이들도 있었어요”
또 당시 진료시설이 지금과같이 발달하지 못해 엑스레이를 통해 내장과 콩팥 등도 촬영했단다. 내시경이 없던 시기로 장기 내부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려면 결국 엑스레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옹은 “결핵에는 약도 없어 보양식이 최고로 여겨지던 때”라며 “군에서 진료 경험을 통해 대전에서도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옹은 충남도 지역을 다니며 이동 진료를 벌였던 1976년 이동 도립병원을 만들 때를 기억했다. 넓은 충남 지역에 도립병원이 2곳으로 의료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벌이는 일이었다. 당시 치과·한의사 등 동료 의사를 설득해 무료 봉사인이동 도립병원에 참가시켰단다. 필요한 의료기기를 사는 데 힘들긴 했지만, 그때만큼 좋은 기억으로 남은 때도 없었다는 것.
“이동 도립병원은 버스에 의료기기를 싣고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천막 밑에 책상을 펴놓고 진찰하던 진료소였지요. 당시 대전이나 충남 모두 의료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동 진료소가 농촌지역에서는 그나마 희망이었습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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