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으능정이에서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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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밖]으능정이에서 물들다

  • 승인 2009-10-28 11:46
  • 신문게재 2009-10-29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청년, 장년, 중년을 거치며 많은 색깔을 지니는 동안, 은행정(銀杏亭)이 있던 으능정이 부근을 변함없이 걷는다. ‘은행동(銀杏洞)’에, 닥쳐올 모진 추위 예감할 은행나무길 하나 없어도 걷는다. 도쿄 이쵸나미키(은행나무길)나 남이섬 은행나무길 호사는 욕심이고, 금산 보석사, 영동 영국사, 부여 고란사 은행나무… 그저 한 그루만!


세월의 깊이를 가늠할 노거수 한 그루 없는 도심은 황량하다. 가지 밑에 민망하게 불쑥 솟아 공적을 쌓는 태안 흥주사의 남근 은행나무, 마의태자의 한이 서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같은 나무 하나 없어 어딘지 휑하다. 그럴 때 찾은 자연― 아산 맹씨행단 은행나무가 `선연(嬋娟)한 미인'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을 금세 물들게 하는 샛노란 은행잎, 뭣보다 “행단”의 말 굴리는 소리와 말뜻이 괜찮다.

행단(杏壇)은 은행나무로 쌓은 단이다. 유교교육의 상징인 행단은 논어 전편을 눈 씻고 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데다 `살구 행(杏)' 자가 살구와 은행에 아울러 쓰여, 행단이 살구나무 단이라는 일설이 예부터 힘을 잃지 않고 있다. 행인(杏仁)은 살구씨, 행자목(杏子木)은 은행나무 목재다. 지명에 흔한 행촌(杏村)은 살구나무마을이거나 은행나무마을이다. 은행은 `은빛 살구', 영어의 `실버 애프리캇(silver apiricot)'도 같은 의미다.

어쩌면 유가의 행단은 실제 쌓은 단이 아닌, 상징화된 고대(高臺)일 수도 있다. 그보다 지금 짚으려는 게 학행과 덕행인데 무엇이면 무엇하랴. 탐구하되 탐닉하면 그 노예라는 사실도 챙겨본다. 천하를 얻자면 스승 1명, 책사 1명, 충복 3명이 필요하다는 말도 버리긴 아깝다. 대통령을 봐도, 한국시리즈를 봐도 그렇고,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다. 진짜를 알아야 가짜도 아는데 진짜를 외면하니 문제다.

속성을 모르면 오해를 부른다. 생태적으로 은행나무의 역한 냄새는 열매를 위한 자기방어 수단이다. 유가에선 그래서 벌레 들끓는 난세에 탐관오리 되지 말라는 우의(寓意)로 쓴다. 국립산림과학원이 열매 맺지 않은 가로수용 은행나무를 개발했다는데, 물리적 거세나 화학적 코팅 방법이 음양의 이치를 깨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향교에 가보면 암나무와 수나무를 분리해 심는다. 남녀가 유별하다.

하지만 말했듯이 암이냐 수냐, 살구냐 은행이냐보다 그 아래서 깨우치는 행단학습법의 실체가 종요롭다. 현대사회에 부족한 부분도 그런 걸 거다. 기생오라비 같은 아파트를 쑥쑥 올리고 요녀 같은 냇물을 철철 짓지만 기다림의 미학, 천년의 사랑이 거기 깃들 리 없다. 지구가 이야기 중심으로 돈다는 설동설(說動說)을 신봉한다면 그렇다. 전우치전의 전우치(田禹治)가 심은 논산 성동 은행나무가 정겨운 건 그런 이유다.

정신이든 실체든, 이제 은행나무를 심어야겠다. 달콤한 언어들, 오해와 파벌, 신종플루의 공포, 고양이 꼬리같이 쳐드는 의심을 거두고 허적한 마음자리에 딱 한 그루만 심는다. 그 은행나무 갈피에서 행간(行間)을 읽을 줄 안다면 책은 단지 참고서적에 불과하리라. 그런 생각으로 자신만의 행단을 쌓는다면 가는 가을이 덜 쓸쓸하겠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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