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윤도 건양대 교수 |
연해주지방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으로서 대일 항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독립군 지도자이기도한 안 의사의 명성은 거사 직후 3개월여 계속된 재판과정에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안의사는 단순한 자객으로서가 아니라 이토에 대한 분명한 처단 이유와 당시 조선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본의 만행들을 조목조목 밝혔고, 동아시아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평소의 지론을 재판장에게 당당히 밝히는 등 비록 죄인이지만 법정의 판사와 감옥의 간수 등 일본인들까지 감동시켜 그들로부터도 흠모를 받았다.
그 뿐만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신문들은 통감부의 눈치를 보느라 사실 보도에만 그쳤을 뿐 드러내놓고 안 의사의 의거를 환영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반해 중국의 신문과 지도자들은 대대적인 칭찬과 환영 일색이었다.
당시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던 손중산(孫中山) 은 “공(功)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 라는 제사(題詞)를 써서 안 의사의 의거를 찬양했다. 이어 당시 난징(南京) 정부 대통령 이었던 장개석(蔣介石)은 “장렬한 한 생 천추에 빛나리(壯烈千秋)”라고 남겼다.
또 중국 근대사의 가장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는 “안중근은 해와 달처럼 영원할 것이며, 살아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혀 동반하리라”고 우러르는 마음을 표현했다.
중국 건국 원로의 한 사람으로 후에 총리를 지낸 주은래(周恩來) 는 “중일 갑오전쟁(淸日戰爭) 후 중조(中朝) 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중국의 근대 민주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장태염(章太炎)은 “아시아주 제일의협(亞洲第一義俠)”이라는 제사를 써 칭송했고 안 의사를 위하여 ‘안중근송(安君碑)’을 집필했다. 그는 이토가 만주 시찰시 청나라 관리들의 비열한 행위와 안 의사가 체포 후 기백이 의젓한 모습을 대조하여 “융희(隆熙) 2년 가을의 9월, 괴수 이토가 요동반도를 지나가자 청나라 총독 이하 관리들이 모두 개미떼처럼 몰려나와 길가에 엎드린 채 황제를 배알하듯 절을 했다. 안중근은 의거 후 곧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쓸데없는 말이란 한마디도 없었고 오히려 그 기백이 의젓하여 천하에 알려지니 지사들은 더욱 감동되고 격분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이같이 당시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의거를 칭송한 것 뿐만 아니라 당시 각지에서 발간되던 신문들도 보도나 사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신문들은 이어서 안 의사의 재판과정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가장 적극적인 보도를 했던 신문은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민우일보(民?日報)’였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21일 동안 54개의 기사, 사설, 시사평론 등 매일 2~3건씩의 후속 보도를 했다. 민우일보의 이같은 보도태도는 바로 중국과 일본 간 외교문제로 비화돼, 그해 11월 19일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같은 내용들은 모두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는 서명훈씨(82ㆍ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 가 오는 26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을 계획중인 책 “중국인 눈에 비친 안중근 의사 의거”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다. 그는 20여년간 중국의 대도시들을 돌아다니며 100년전 신문들을 찾아보며 안의사 의거 관련 기사의 영인본 작업과 주석 작업을 해왔다.
안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돌아가신 애국자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추모 분위기 조성도 중요하지만 세계방방곡곡에서 사라져가는 조국의 흔적을 찾아 소리없이 애쓰고 있는 살아있는 애국자들을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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