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도자기 역사 '찬란한 유산'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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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요산책> 14. 도향 '아리타'의 역사

  • 승인 2009-10-19 19:33
  • 신문게재 2009-10-20 12면
  • 안영진 前중도일보 주필안영진 前중도일보 주필
 이삼평이 처음으로 백자를 구워냈다는 ‘아리타(有田)’란 어떤 곳인가.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지금은 인구 2만 명이 오로지 도자기에 매달려 사는 소 도읍이다. 이곳에는 대소 가마(窯)가 1400개가 있는 세계적인 도향으로 알려져 있다.
 
▲ 13대 이삼평作<위>과 14대 심수관作 도자기
▲ 13대 이삼평作<위>과 14대 심수관作 도자기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도읍 전 주민이 도요에 종사하고 있다. 도토 가계, 도자기 점포, 도산매 상으로 되어 있는 도읍…. 옛 가마터만도 200여 곳이 남아 있으며 그 중 〈덴구〉계곡은 사적으로 지정, 도자기 발전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1616년 일본 최초로 이삼평이 백자를 구워낸〈덴구〉계곡은 언덕 위에 계단식 오름 가마터는 우리나라 고창 용산리의 오름식 가마를 본 딴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삼평이 축조한 것으로 ‘이즈미야마’ 자석장 입구에는 이삼평이 백자를 발견한 곳이라 해서 비석까지 서 있다.
 
 한글로 된 안내판에는 〈400년 동안 하나의 산을 도자기로 바꾸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을 정도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덴구〉 계곡 인근에는 이삼평이 잠든 묘자기 남아 있으나 안타깝게도 그 묘지 관리는 허술하다. 하지만 이삼평을 도신으로 모시는 신사는 대단하다. 이 신사의 도리이(鳥井)는 여느 것과 다르다는데 눈을 끈다.
 
 이삼평의 후예들
 
 이곳 도리이는 백자에 청색 문양이 새겨져 있어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도리이가 아리타에 있는 모든 가마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도산신사에는 주신인 응신청황(應神天皇)과 부신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영주) 그리고 도조 이삼평 등 세 신을 모시고 있다.
 
 일본 도자를 찬란하게 탄생시킨 이삼평을 기리기 위해 일본인들은 그를 도자기의 신으로 받드는 것이다. 이삼평이 없었다면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도산신사에서 다시 산길을 따라 300m쯤 오르면 아리타 마을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 정상엔 도조 이삼평비가 우뚝 서 있다.
 
 아리타 지역 주민들이 ‘아리타 도자기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삼평이 가마를 연 지 300주년을 기념해 1916년 10월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이삼평은 우리 아리타의 도조임은 물론 일본 요업계의 큰 은인이다. 현재 도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입어 그 위업을 기려 여기에 모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내용만 보아도 아리타 주민들이 얼마나 이삼평을 존경하는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1918년 니시마츠우라(西松浦) 군수는 〈도산(陶山)〉이라는 시를 지어 이삼평비에서 내려다 본 아리타 마을의 아름다움과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을 노래했다.
 
 눈 아래 집이 즐비하게 보이고  
 도자기 굽는 연기가 발아래서 올라온다. 
 솔바람이 그것을 떨어뜨리듯 
 이삼평 도조가 도산을 평정했다
 
 현재 아리타의 13대 후손인 가나가에 요시토와 14대 가나가에 쇼헤이가 도조 이삼평의 예술혼을 이어가고 있다. 14대 쇼헤이는 현재 자신의 작업장에서 백자를 빚기 위해 물레를 돌린다. 도조의 직계 후손인 그가 번듯한 작업장에서 고고하게 백자를 빚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가고 있다.
 
 작업장은 매우 열악하며 삶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도조 이삼평의 대를 이어 5대까지는 도자기를 만들며 가업을 이었으나 6대부터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이유야 어째든 6대부터 12대까지는 도자기와 관계없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13대 가나가에 요시토도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요시토가 가업을 이어 도자기를 빚기로 마음먹은 것은 철도원으로 40여 년의 직장을 마치면서부터였다. 처음으로 새로 시작한다는 자세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배우고 아들 14대 쇼헤이와 함께 가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리타 거리에 작은 갤러리도 열었고 한국을 방문해 대전 ? 부산 등지에서 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조선 도공들의 정성과 혼이 담긴 도자기를 알리기 위해 아리타에는 현립 규슈도자문화관(九州陶瓷文化館)도 있다. 이곳에는 17~18세기 유럽으로 수출했던 이마리 자기를 수집한 감바라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아리타에 정착하고 이어 이들이 만든 도자기가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는 과정 또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삼평과 조선 도공들에 의해 도자기 문화를 꽃 피운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는 이마리(伊万里), 가키에몬(?右衛門), 이로나베시마(色鍋島)계 등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심당길과 이삼평 가문
 
 일본 도요는 임진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에 의해 뿌리를 내렸는데 이중 ‘아리타’와 ‘사츠마’가 대표성을 지녀왔다. 좁혀 말하면 아리타의 이삼평과 사츠마의 심당길이 그 주체라 할 수 있다. 400년간 이 두 가문의 발자취는 퍽 대조적이다.
 
▲ 14대 심수관
▲ 14대 심수관
▲ 13대 이삼평
▲ 13대 이삼평
 이씨(氏)와 심씨(氏) 가문은 같은 여건인데도 그렇듯 상반된 길을 걸어온 셈이다. 때문에 이 두 가문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일인들은 사츠마보다 아리타에 더 무게를 두는 까닭은 무엇인가. 외형상 아리타는 세계적인 도향으로 사츠마를 압도하지만 아리타는 도읍(町) 전체가 도자기에 매달려 명치시대는 일본의 수출 품목 제1호였다.
 
 그래서 명치시대는 국책사업으로 한 몫을 했고 일본 군국주의(부국강병)의 원동력 구실을 했다. 그 이전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도자기 산업이 도막(倒幕) 운동의 자금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일인들의 도자기 선호도는 그야말로 광적인 데가 있었다. 이에 반해 사츠마는 외양면에선 아리타를 따르질 못했다.
 
 그러면서도 사츠마의 역사는 찬연하다. 아리타는 시민(町民) 전제가 오로지 도요산업에 매달려 1400개의 크고 작은 도요가 가동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츠마엔 10여호만이 가마를 지키고 있지만 사츠마가 큰 소리 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사츠마 도공들은 300년간 긍지를 고집스럽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40여명의 도공들은 명치유신 때까지 한복차림에 혈통보존과 언어, 조선성씨를 지키며 살아왔다. 필자는 심수관(14대)씨와 인터뷰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상들이 쓰던 말총으로 짠 망건(網巾)하며 교린(交隣)수칙이라는 책자를 내보이며 눈물을 글썽이던 심수관씨….
 
 사츠마요는 심당길(초대)로부터 14대 심수관 씨와 15대(一揮)씨까지 도요를 이어왔다. 그래서 14대 심수관에겐 한국정부가 〈명예대사〉로 임명한 바 있다. 그러나 아리타의 이삼평 가계는 심 씨 가문과는 다른 점이 많다. 같은 여건(처지)이였는데도 이삼평 가계는 심 씨 쪽과 내력이 다르다.
 
 풍문에 따르면 이삼평은 계룡산 계곡 학봉리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일본 침략군의 길 안내를 한 바 있고 일본으로 끌려가자 즉시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이다. 이삼평 후예는 가업(도요)를 계승하질 못했던 것이다. 5대까지는 이어왔으나 6대에서 12대까지는 공백상태였다.
 
 13대에 와서 다시 도요에 종사, 현재 14대로 이어온다. 13대는 그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소화(昭和 )시대 철도원으로 일하다 퇴역한 후 조상의 유업에 손을 댔다. 이삼평은 도신(陶神)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가업이 단절되는 바람에 그 문중엔 명장이 없다.
 
 그래서 후예들의 가마(窯)는 외소하며 생활 또한 곤궁하다는 풍문이다. 이에 반해 사츠마의 심수관 도요는 오늘날 번영가도를 달리고 있다. 또 사츠마 도공후예 중에는 출중한 인물들이 나왔다. 초대 박평의의 후예 중에는 도오고 시게노리(東響武德)가 있다.
 
 그는 2차 대전(태평양전쟁) 때 외상(外相)을 두 번이나 지낸 인물이었다. 심수관 씨는 팔지에게 그는 큰 인물이었다며 애써 추켜세우고 있었다. 동경제국 대학 독문과를 나와 독일 유학을 했고 고등고시를 거친 준재였다고…. 그는 평화주의자였으나 중책을 맡은 탓에 맥아더 법정(군사재판)에서 중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한 인물이다.
 
 맺는 말
 
 이상과 같은 배경(역사성) 탓에 사츠마 요의 심수관 가문은 줄곧 번영가도를 달린다. 특히 한국인들은 그래서 사츠마 요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성원을 아끼질 않고 있다. 이와는 달리 아리타에 대한 향의는 대수롭지 않다. 연구차 또는 관광차원의 순례가 주목적인 듯하다. 13대 삼평은 〈선대(이삼평)는 위대했으나 후손들이 못나서….〉
 
 제구실을 못한다고 한탄하더라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할 일이다. 비록 이삼평의 행적이 사츠마의 심수관 가계에 미치지 못한다 해서 마구 폄하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군이 침략해 왔을 때 길안내를 하고 일본에 끌려가자 즉시 창씨개명을 했다는 점을 꼬집는다.
 
 하지만 당시 힘없는 도공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게 분명하다.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임란 때 우리 조정에선 갑론을박 싸움질이나 하다 왜군에 밀려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서야했던 그 정황…
 
 힘없는 도공 피치 못해 〈부역〉을 했다 해서 마구 몰아세우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항변이 그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일본 도요를 바라봐야 하는가. 한마디로 균형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수혜기〉와 고려자기, 이조백자를 전해줬다는 우월감만으론 자적할 수는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늘의 일본 도자기는 세계 정상이라는 걸 바로 알아야 한다. 1997년 10월 〈후쿠오카〉에선 〈한 ? 일 도자문화 교류 400년전〉이 열린 일이 있다. 여기에는 한 ? 일 양국 명장들이 출품을 했다. 이때 사츠마의 14대 심수관과 아리타의 이삼평 13대도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심수관은 당당했고 13대 이삼평은 주눅이 든 모습이더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심 씨 가문과 이삼평 요에 대해 균형 잡힌 눈으로 바라보고 또 자기의 원류(선진)로서의 긍지를 지녀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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