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출장온 박동하. 두보초당에서 우연히 가이드를 하고 있는 미국 유학시절 친구 메이를 만난다. 어쩐지 좀 쑥스럽고 반가운 재회. 유학시절 키스도 했고, 자전거도 가르쳐줬다는 동하와 키스는커녕 자전거도 탈줄 모른다는 메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둘은 가까워진다. 동하의 귀국일, 공항에 달려온 메이. 동하는 귀국을 하루 늦추고, 둘의 소중한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허진호가 변했다. 지금까지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연인들은 모두 슬펐다. 대부분 헤어지거나 불분명한 결말로 끝이 났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다림은 사랑을 시작조차 못했기에 애틋했고,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고 은수를 원망했다. ‘외출’의 인수와 서영은 가장 힘든 고통의 순간에 서로 만났고, ‘행복’의 영수와 은희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꿈꾸듯 사랑했다.
‘호우시절’은 전작의 연인들을 향해 던졌던 날 서고 냉소적인 시선들을 모두 거둬들인다. 대신 연인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싶어 안달한다. 밝고 가벼우며 유머러스하다. 차분하면서도 희망적이다. 확실히 변했다.
“가슴 설레고 따뜻하며 행복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이전엔 좀 더 슬프고 어두우며 가슴 아픈 감정들이 영화에 많이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반대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게 더 좋아진 것 같다.” 허 감독의 말.
스타일도 달라졌다. 예쁘게 찍는 건 여전하지만 장기인 ‘길게 찍기’가 줄었다. 한 컷의 길이를 줄여 리듬에 속도를 내고, 사용하지 않던 ‘들고 찍기’까지 동원했다. 그 덕에 카메라는 사랑의 설렘과 떨림,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정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허진호 영화에서 즐겨 선택돼온 ‘눈’ 대신 이번엔 ‘비’가 내린다. 영화의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好雨知時節-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에서 따왔다. 아닌 게 아니라 ‘호우시절’은 가을보다 봄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미국 유학시절 가깝게 지냈던 동창생 메이와 재회하고, 애틋한 사랑을 키워가는 이야기. 긴 겨울을 지내고 새 봄을 맞는 사랑 이야기다.
동호와 메이가 과거의 추억을 더듬으며 토닥토닥 말싸움을 하는 장면은 새싹이 돋는 듯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거리에서 춤을 추며 설렘을 만끽하는 모습은 봄바람 같다. 화면은 비가 오는 순간조차 따뜻하다. 두 남녀가 나누는 영어 대사는 원어민들처럼 매끄럽진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섬세하게 전해준다.
물론 이 영화에도 삶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그것은 때론 메이가 홀로 흐느끼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 그늘이 설핏 드러나는 순간에조차 영화는 진창에 발을 넣지 않는다. 인물들은 시종 사랑스럽고 대화는 대부분 유쾌하다.
엽서에서 막 뽑은 듯 화사하게 찍은 청두의 거리에서 멋진 외모의 남녀 배우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사랑 앞에 들뜨고, 손을 내밀까 말까 주춤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소소한 일상의 감정선을 연기한 정우성은 이전과는 다른 친숙함으로 한 발 더 관객에게 다가선 느낌이다.
청순한 매력의 중국 배우 가오위안위안은 투명하게 사랑의 설렘을 체화했다. 비중이 큰 조연으로 등장하는 김상호는 사람 좋고 눈치 없는 남자 역을 맡아 제 몫을 다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의 멜로를 오랜 연인처럼 사랑해온 관객에겐 배신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허 감독의 입장에선 언젠가 한 번은 꼭 그려보고 싶었던 사랑의, 영화적인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진정 그는 변한 것일까.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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