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열린 백제의자왕 후손 찾기 포럼에서는 고대 동아시아 문화발전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행적과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과 그 흔적을 찾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됐다.
김영관 청계천문화관 관장은 “의자왕에 대한 평가가 충신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간신들의 말에 놀아난 황음무도(荒淫無道)한 군주라는데 집중되는 반면 당으로 압송된 경위와 경로, 당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사비에서 황해를 건너 낙양까지 끌려가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어떤 상태로 끌려갔는지, 그의 무덤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몇 살에 죽었는지 등 앞으로 풀어야할 역사적 과제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백제문화의 일본 전수와 멸망 뒤 수많은 백제인이 일본으로 망명해 그들이 지니고 있던 백제문화가 일본 고대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원광대 이다운 교수는 “백제 망명인과 그 후손들은 일본사회에 정착하면서 점차 동화되어 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백제왕씨(百濟王氏)와 같은 왕족의 혈통을 잇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일본에 정착한 백제왕족의 혈통을 잇고 있는 씨족의 활동과 역할을 이야기했다.
그는 또 “의자왕의 아들 중 선광(善光·禪廣)이 백제왕씨의 시조가 되었다”면서 “백제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선광은 귀족 중에서도 상급귀족에게 부여한 정관삼이라는 정삼위에 상당하는 높은 관위를 받는 등 학문과 군사분야에서 활약하며 일본 고대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했다.
중국 지역을 중심으로 의자왕 후손 찾기를 발표한 공주대 양종국 교수는 “의자왕 후손들은 자기 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성씨까지 바꿔가며 숨죽여 지낸 것과 달리 흥미롭게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신분을 인정받으며 생활한 후손들이 많았다”며 중국사료에 나타나는 부여씨(百濟氏) 중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기록을 제시했다.
한편 이번 포럼에는 중국 일본 등 백제의 교류 흔적과 의자왕 후손과 관련된 중국 시안(西安), 뤄양(陽), 난징(南京)과 일본 미사토조(美香村), 다자이후시(太宰府市),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학자와 관계자 등이 참여해 백제유민과 의자왕 후손들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임연희 기자 lyh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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