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훈 한남대 교수.일본 게이오대학 객원교수 |
일본의 대정봉환이 있은 27년 뒤인 1884년 12월4일 김옥균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33세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일본이 한 것처럼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어 청나라에 대한 조공 철폐와 문벌 제도 등 폐지 등을 주장하며 단행한 쿠데타는 준비부족과 정보부족으로 실패하여 삼일천하로 끝났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에 일본에 망명했다가 정권재창출을 목표로 이홍장을 만나러 상해(上海)에 갔으나 1894년에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 당했다. 그의 시체는 조선으로 보내져 능지처참을 당하여 목이 마포의 양화진에 걸려 있었는데 수행원이었던 카이군지(甲斐軍次)라는 일본인이 김옥균의 목을 진정사에 이장하고 비석을 만들었으며 그도 김옥균의 묘 옆에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후에 유골은 한국으로 귀환됐다고 한다.
일본의 대정봉환을 이룬 메이지유신은 무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강력한 무기와 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갑신정변을 일으킨 조선의 개화파들은 양반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도 병력도 없이 일본의 협력만 믿고 정변을 단행하지만 생존을 위한 교활함까지도 높이 평가하는 무사도와 대의명분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양반정신의 협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에 망명하여 10년 정도를 삿포로, 오가사와라 등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냉대를 받고 본인이 생각한 정변의 모델이었던 일본의 배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울분을 삭였을까?
특히 김옥균이 신뢰하고 의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10)가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3월 16일 자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기술한 `탈아론(脫亞論)' 즉, 이제 일본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중국, 조선 등의 비문명국인 악우(惡友)들과 친할 경우,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아시아의 악우들을 사절해야 한다' 는 내용을 보고 아마 분해서 이를 갈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같이 협력하고 달려가자던 후쿠자와의 배반은 힘없는 망명객으로서 자기성찰과 재기를 위한 새로운 목표로 가는 기폭제가 되었을까? 김옥균의 묘를 보고 현재의 대한민국을 상황을 생각한다. 근대화를 위한 개화파와 수구파의 첨예한 갈등, 36년간의 식민지지배 역사 그리고 남북 분단과 갈등 등으로 이어진 우리의 역사를 그는 어떻게 평가할까.
또 대한민국의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내다보고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적어도 그의 묘비는 근대화나 통일은 타국의 협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 했다.
이 사실을 100년 전 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100년후에도 같다는 것을 묘비를 통해 알려주는 듯해 이번 방문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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