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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개시 60주년 그 현장 그 모습> 18. 대전천과 목척교

  • 승인 2009-10-07 14:16
  • 신문게재 2009-10-08 12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 서서, 나 홀로 외로이 이슬비를 맞으면서, 그 옛날 그 님을 안타까이 흘러보낸 첫사랑 못 잊는 대전의 밤이여”가수 안다성 씨가 부른 `못 잊을 대전의 밤'의 가사 중 한 대목이다. 대중가요에 등장할 만큼 사랑받던 대전천 목척교는 지금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예전 멱감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볼품없는 하천으로 전락한 대전천을 왜 그리도 많은 사람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예전의 생태하천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대전천과 목척교가 갖는 지역의 상징성을 알아봤다.<편집자 주>


▲`대전 성장의 상징'=대전천과 목척교는 시대에 따른 대전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인이 되어왔다.

대전에 철도가 설치되고 사람들이 모여 도시가 만들어지는 1920년대부터 광복과 6·25전쟁, 중앙시장 개설 등 대전발전의 큰 축을 이룬 대전의 역사현장에서 대전천과 목척교는 그 흐름을 함께해 왔다.

1920년대 대전역이 만들어진 후 일본인들이 모여들면서 도시가 형성된 대전은 초창기부터 대전천을 생활용수와 빨래터로 이용해 왔고 물고기 어장으로 역할을 했다. 또 6·25전쟁이 발발해서는 피난민들이 대전지역에 몰려들면서 중앙시장을 비롯해 대전천 인근에 천막 등 임시 거처를 마련해 집단 거주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복개공사, 하상도로 등이 놓이면서 대전 도시발전에 따라 대전천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목척교는 대전이 경제적 성장으로 발전을 거듭할 때 외곽으로 확장해가는데 주요 길목이 돼 왔다. 처음에는 대전천을 돌 징검다리로 건너던 것에서 시작해 나무로 만든 목척교를 지나 차량 2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콘크리트 다리를 거쳐 현재 모습의 목척교까지 변해왔다. 대전의 시작과 함께 이후의 시대 변화를 그때마다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대전의 많은 하천과 다양한 다리 중 시민들이 유독 대전천과 목척교에 대해 남다르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빨래하고 목욕하던 추억 간직한 대전천=대전천은 그 시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흘러왔지만, 하천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짧은 시간 빠르게 변해왔다.

대전천에 다리조차 놓을 수 없어 1920년대 돌로 징검다리를 놔 건너다니던 시절부터 생활용수를 사용하고 빨래터로 사용하던 시기, 그리고 겨울철이면 스케이트장으로 활용되던 데서 이제는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와 주차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전천은 대전에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초창기 새롭게 조성된 중심가와 그렇지 않은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대전천을 중심으로 대전역 방향에는 일본인들이 모여 조성된 유흥가와 상가 등이 밀집한 반면 대전천을 건너서는 아직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전시 100년사 기록에 따르면 1940년대 주민들이 모여 살 던 곳은 중동, 원동, 인동까지 대전역과 대전천 사이 옆으로 길게 늘어선 모양으로 집단 주거지역을 형성했다. 또 1960년 당시 인구밀집도 조사에서도 신안동이 3만 8376명/㎢으로 가장 높은 인구 밀집도를 보였으며 중동 3만4555명 /㎢, 문창동 3만 4170명/㎢ 등의 순이었다.

이는 전쟁 직후에 조사된 것으로 피난민으로 인구가 늘어난 이유도 있지만 도시 대전의 초창기 모습은 대전역과 대전천을 기반으로 성장해왔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대전천을 가까이 두고 주거지역을 형성한 주민들은 대전천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보다 대전천에 수량도 많고 물도 깨끗했던 1950년대에는 마실 물과 어장 그리고 아낙들이 이용하는 빨래터로 이용됐다. 동구 원동에 사는 최경창(58)씨는 대보름마다 대전천에서 목욕하던 일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최 씨는 “대보름이면 대전천에 모여 목욕을 했으며 남성들은 이 날 만큼은 대전천을 지나기를 피했다”고 회상했다.

반면 도심을 가르는 대전천은 잦은 범람으로 피해가 이어지기도 했다. 대전시 100년사에는 대전천의 낮은 제방을 높이기 위해 공사가 자주 진행됐고 1927년 판암천과 대동천, 대전천의 하류와 합류하도록 하는 공사로 인해 대전에 유서 깊었던 송시열 선생의 옛 터와 소제호 전설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중앙시장과 함께 대전천은 생활의 현장으로 활기를 띠었다. 1969년 중앙시장에 큰 화재가 발생한 이후 대전천 둔치에는 임시천막이 설치돼 상가를 잃은 상인들의 임시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또 인동 등지의 대전천에서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들이 전투복을 염색해 판매하거나 국밥을 끓여 파는 생활의 현장이었다.

대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천은 겨울이면 꽁꽁 언 하천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던 시절에 대전천 스케이트장은 최고의 놀이 장소였다.

그러나 1974년 대전천에 덮개를 씌운 복개공사 이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 후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복개된 대전천 위에 세워져 유통시장의 큰 축을 이뤘다. 대전지역의 도심 교통난이 심각해지던 1990년대 둔산지역과 연결하는 하상도로가 놓이고 그전부터 대전천은 하상주차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전천에 흐르는 유량도 감소해 평소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목척교 `징검다리에서 현대적 다리로 변화'=대전천에 나무로 된 목척교가 처음 놓인 게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정이 나오고 있다.

대전시 100년사에는 일본강점기인 1912년 4월 목조교량인 목척교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나오는 반면 `새로 보는 대전 역사'에는 대정 13년 8월 대전교가 준공됐다는 기사가 게재돼 대전교가 현재의 목척교를 의미함으로 1924년 목조 목척교가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목척교 역시 대전도시 형성과 그 시작을 같이해 시민들에게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대전역에서 목척교까지가 대전의 초창기 주거지역이었으며 목척교를 넘어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대전의 시세를 확장했다는 의미였다.

1960년대 목척교에서 대전역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전 최고의 상업지역이었다. 장을 보거나 특별히 물건을 살 때는 목척교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지역에 생활권을 둔 주민들은 목척교를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로 활용했다.

1974년 대전천을 복개해 만든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는 당시 건축기술 수준에서는 놀라운 발전이었다. 목척교가 지금의 모습을 갖기까지 4번 정도 변화를 겪었다. 목조교량의 목척교가 만들어진 후 1960년대 콘크리트 구조의 목척교로 바뀌었다. 복개공사와 더불어 도로폭이 확장됐다. 이후 몇 차례 변경 후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반면목척교를 중심으로 대전천 복개공사는 당시에는 새로운 공법으로 환영받았지만 이후에는 목척교뿐만 아니라 대전천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천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은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복개 건물로 가려졌으며 목척교는 시민들에게서 차츰 잊혀 갔다.

▲대전천·목척교 복원사업=대전천과 목척교의 본래 모습찾기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박성효 대전시장 취임 후 본격화되고 있다.

대전천에는 친수공간이 조성되고 현재 메말라 있는 대전천을 깨끗한 물이 흐르는 옛 대전천으로 되돌리는 사업이다. 목척교 역시 현대적 의미를 더해 새롭게 가설하는 계획이다

생태하천 복원사업 일환으로 대전천 위에 우뚝 버티고 있던 중앙데파트는 지난해 철거됐다. 남아있던 홍명상가도 지난 9월에 완전 철거됐다. 대전천을 뒤덮었던 보기흉한 건물이 일단 사라진 것이다.

대전천을 억누르고 있었던 목척교 주변 하상도로도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이와함께 대전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새가 찾아오도록 하기 위한 생태복원 작업이 진행중이다.

목척교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2010년을 목표로 대전천과 목척교의 옛모습을 되찾겠다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전천과 목척교의 예전 정취를 느낄 수 있을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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