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1. 대전시 1호 웃다리농악
2. 시 2호 대전 앉은굿/충남도 24호 태안 설위설경
3. 시 13호 들말두레소리/도 16호 금산 물페기농요
4. 도 1호 한산세모시짜기
5. 충청의 명주/대전 송순주, 한산 소곡주, 청양 구기자주,
6. 시 7호 소목장/도 18호 소목장
7. 시 6호 불상조각장
8. 시 8호 매사냥
9. 도 6호 남포벼루제작
10. 시 16호 초고장/도 31호 홍성 댕댕이장
1. 대전시 1호 웃다리농악
배첩장, 단청장, 궁시장, 대목장, 소목장, 한지장, 댕댕이장 등 이름만 들어서는 낯설기 이를 데 없는 무형문화재 종목들이다. 대전에는 17종목의 시지정 무형문화재가 있으며 충남에는 8종목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38종목의 도지정 무형문화재가 있다.
무형문화재는 이름 그대로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가운데 그 중요성을 인정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정한 문화재다. 또 무형문화재는 그 대상의 형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기능과 예능에 의해 전승되는 까닭에 유형의 문화재보다 쉽게 사회적·문화적 환경 변화에 노출되어 변형되거나 급격히 사라져가기 때문에 기록화가 절실하다.
이에 본 시리즈에서는 대전·충남지역의 무형문화재를 찾아 기·예능 보유자(단체)의 제작과정과 시연모습을 기사와 영상으로 소개하며 이들의 전승계보와 현황, 삶의 애환들을 10회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 주>
“갠 지 갯지갠 지개갱/개갱 갯 지갠 지개갱.”
꽹과리와 징, 장구, 북으로 장단을 치며 날라리(태평소)를 불고 상모를 돌리는 신명난 춤사위가 벌어지면 손으로 장단을 맞추고 어깨가 들썩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국인의 멋과 흥이 한데 어우러진 농악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대표적 민속음악으로 다정다감한 우리 가락이자 민족의 선율이다.
대전시무형문화재 1호 대전 웃다리농악의 예능보유자는 송순갑 선생이었으나 지난 2001년 작고해 현재는 송 선생의 장남인 송덕수 대전웃다리농악보존회장이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1979년부터 송순갑 선생에게서 웃다리농악을 배우기 시작해 2004년 예능보유자가 된 류창렬 씨는 꽹과리를 비롯해 무동, 태평소에 이르기까지 고루 기능을 갖추고 전수학교를 지도하며 웃다리농악으로 석사학위를 받는 등 연구에도 힘쓰는 인물이다.
대전 웃다리농악보존회는 1960년대 송순갑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중앙농악회가 전신으로 40여년 중부지방에서 뿌리를 내리며 지역축제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 참가해 1987년과 1991년에는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농악부문 장원을 수상하기도 했다. 웃다리농악이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칠채가락과 무동타기인데 웃다리농악의 판제는 인사굿-돌림벅구-당산벌림-칠채오방감기와 풀기-무동쾌자놀이-소고절굿대놀이-십자걸이-(가새치기)-사통백이-원좌우치기-네줄좌우치기-쩍쩍이-풍년굿-고사리꺾기-도둑굿-소고판굿놀이-무동꽃받기-개인놀이(따벅구·설장구 등)-뒤풀이-퇴장굿으로 이뤄진다.
송덕수 대전웃다리농악보존회장은 “본인 살아계신 동안 절대 꽹과리를 잡으면 안 된다던 아버지의 엄명 때문에 남 앞에서 마음 놓고 악기를 두드려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대전웃다리농악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음악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故 송순갑 선생은 누구...
“어려운 시절 배 곯아가면서 연습할 때 슬그머니 나가셔서 누런 바가지에 보리밥과 김치, 콩나물을 넣어 비벼 가지고 들어와 나눠주시던 모습이 잊혀 지질 않습니다.”
1979년 송순갑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 2004년 대전웃다리농악(대전시무형문화재 1호) 보유자가 된 류창렬(57))씨는 말이 없으면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후배와 제자들을 챙겨주던 스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류 씨가 회고하는 이 시대 마지막 남사당이자 타악의 1인자, 상쇠 1인자인 송순갑 선생은 평소 말 수가 적고 겸손하며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꾸지람 한번 하지 않아 덕이 많은 사람으로 통했단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대단한 기량을 선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송 선생은 1909년 은산별신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호)가 열리는 부여군 은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마을 두레패의 삼동으로 뽑혀 무동을 타면서 기예와 가락을 익혔는데 경남 진주, 부산, 원산, 천안 등 전국 각지를 돌며 공연을 펼쳐 풍물과 땅재주(살판)의 명인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쇳가락은 쉽사리 흉내 낼 수 없는 고도의 기능과 신명이 깃들어 있으며 워낙 장구를 잘 쳐 ‘송장구’라는 별명까지 얻은 장구 솜씨도 대단했다는 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평가다.
신들린 듯한 그의 쇠가락과 가슴을 울리는 장구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지만 지난 9월 3일 대전시 유성구 원촌동 시설관리공단 내에 마련된 웃다리농악 전수교육관에서 1500여명의 회원들이 대전시무형문화재 1호 웃다리농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글=임연희·동영상=금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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