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매료시킨 이마리야키... 그 태동은 조선인 이삼평

세계를 매료시킨 이마리야키... 그 태동은 조선인 이삼평

13. 日 자기 유럽을 석권

  • 승인 2009-10-05 18:23
  • 신문게재 2009-10-06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주필
일본 도자기는 세계 최고라는 명치시대부터 듣고 있었다. 일본 도예시조는 이삼평. 195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이다. 그가 ‘아리타’의 도산 신사에 모셔질 정도로 추앙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1616년 일본 최초로 백토를 발견, 자기 굽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리타’ 자기는 ‘나베시마’ 가문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다. 당시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이마리야키’로 불리며 일대 선풍을 일으켜 독일의 마이센자기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도자기 산지로는 ‘아이치’ 현의 세토 지역이 유명했다. 때문에 통상 일본도기를 ‘야키모노’나 ‘세토모노’라고 한다. 일본 도자기는 약 1만년 전의 ‘조몬’ 토기와 ‘야요이’ 토기를 기원으로 한다지만 실제로 일본에서 도기를 구워지기 시작한 것은 나라시대부터였다. 당시 중국의 당삼채 도자기를 들여와 나라삼채(쇼소인삼채)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도조 이삼평의 작품들
▲ 도조 이삼평의 작품들
그 이전엔 한반도 삼국의 영향을 받아 백색점토를 고열로 구워낸 스에키가 있었지만 나라 삼채가 일본 최초의 도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점차 자기에 관한 관심이 급증, ‘헤이안’ 시대에 청자를 들여오게 되면서 당시 일본의 도기는 ‘스에키’ 토기와 ‘나라삼채’, ‘청자’ 세 가지로 구분 지어졌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도기를 만들어낸 것은 가마쿠라 시대로 세토의 ‘가토시로’가 ‘남송’ 유약기술을 도입, ‘세토야키’를 일으키고 무로마치 시대를 거쳐 각양각색으로 성장한 도예문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센리큐’의 다도문화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으로 이삼평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일본 도예의 뿌리를 이룬다. 조선에서는 천대받은 도공들이 포로로 끌려가 귀족의 예우를 받으며 자기를 굽기에 몰두할 수 있었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 일본 도자기는 명실 공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의 도예 작가들은 전통의 보존과 그것을 현대적 계승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 가장 일본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감각과 안목을 지닌 작품들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다.

▲ 이삼평 조선식 등요 설치
일본 도자기 문화가 처음 정착한 곳은 ‘다쿠’였다. 사가현 한복판에 있는 이 마을은 지금 시로 승격해 있다. 당시 태수인 ‘다쿠’에게 ‘좀 데리고 있어 보라’고 맡긴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모두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각별한 대접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다쿠’는 어느 날 이삼평을 불러 그의 의중을 물었다.
“할일이 없어 답답할 터인데 그대 생각에는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묻자 “저는 사기그릇을 만드는 사기장입니다. 전에 하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것이 좋겠군!”

‘다쿠’는 아래 것을 불러 가마터를 물색해 주라고 지시했다. 그가 사기장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기술을 탐낸 ‘나베시마’의 명령으로 ‘다쿠’가 데리고 온 것이 이삼평이다. 그의 수하들까지 붙잡아 왔을 터인데 그것을 다시 재탕하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다.

하지만 구구절절 선심을 강조한 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후세에 각색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째든 ‘다쿠’의 호의는 이삼평에게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 길로 가마터를 찾아 나섰다. 계룡산 인근 고향을 닮은 능선을 찾아 헤맨 끝에 비슷한 곳을 발견했다.

‘다쿠’는 기대에 부풀어 가마의 축조를 허가 했다. 그리고 이삼평을 도자기 제조를 맡아 하는 관직을 주었다. ‘히캉’이란 ‘다이묘’에게 직속된 하위직이었다. 이삼평은 고향의 가마를 본 따 좀 밋밋하지만 능선의 구배를 따라 ‘조선등요’를 앉혔다. 전장 16.5m에 폭 2m, 8개의 소성실로 이어진 작은 등요였다.

장작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찾았다.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원도 찾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한 세 가지 요건을 우선 갖추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토가 없다는 점이었다. 부근을 헤맨 끝에 쓸 만한 흙을 찾아내 마침내 ‘사기’를 구워냈다. ‘다쿠’도 그것을 쓰다듬으며 대견스러워 했다.

이것이 이삼평이 일본에서 처음 축조한 ‘조선등요’이자 최초의 사기장 도방이다. 1994년 3월 다쿠시 교육위원회의 발굴조사에서 이 가마의 실체가 확인되고 유물도 발굴되었다. 다쿠시가 주목한 것은 이곳을 이삼평의 최초 가마가 있었던 ‘당인고장요적’이라 기록한 에도시대 말기의 읍지도 나왔다.

부근 주민들의 구전과 유물이 발구되었다는 소문 역시 눈을 끌었다. 지표조사로 위치를 확인하고 마침내 발굴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의 고문서는 대부분 한국을 지칭하는 ‘가라(韓)’와 ‘가라(唐)’를 혼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한인을 ‘토오진’이라 불렀다.

▲ 장인의 욕심은 ‘완벽’
이삼평이 좋은 흙을 구하지 못해 고심한 흔적은 발굴된 도편에서 엿볼 수 있다. 태토가 좋지 않고 잿물의 밀착도 약한데다 암녹색 녹갈색이었다. 거기에 깨어지고 형태가 무너진 도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흙에 문제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삼평의 가마는 분명히 일본 최초의 조선등요였다. 교육위원회는 ‘17세기 한국 가마를 그대로 일본에 옮겨 놓은 것 같은 유사점이 많을 뿐 아니라 지형적으로도 닮았다.’고 말한 한족 박물관원의 고증도 눈여겨 볼만하다.

▲ 이삼평 도자상
▲ 이삼평 도자상
장인의 욕심은 완벽이다. 화염의 신통력에 의탁하면서도 인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장인정신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때와 장소의 구별이 없었다. 양질의 백토를 찾아내고 1천4백도의 고열을 확보하는 가마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삼평은 다시 가마터의 탐색에 나섰다. 서쪽 5㎞ 떨어진 곳에 또 가마를 축조했다. 그리고 서북쪽 3.5㎞ 지점에도 가마를 세웠다. 발굴단은 이 가마터도 확인해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백토를 찾지 못했다. 그의 꿈은 고향의 그것과 같은 백토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삼평은 결심했다.

그 길로 ‘다쿠’를 찾아갔다. 사정을 말하고 백토탐색을 위한 여행을 신청하자 ‘다쿠’도 동의했다. 사가항 영내 전역의 자유여행 허가를 얻었다. 그가 ‘다쿠’를 떠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1935년에 간행된 ‘히젠도자사’는 1614∼1615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에 간 것이 1598∼1599년경이니까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세 청년이 40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삼평은 발길을 서남쪽 아리타로 돌렸다. 임진왜란 때 붙잡혀 온 많은 조선사기장들이 그곳 어디엔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이 방향을 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을 만나 고국소식이라도 전해 듣는 것을 가슴조이며 기다렸을 것이다. 이웃 다카도리로 잡혀간 팔 산이 고국으로 달아나려다 붙잡혀 감금당한 애절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수소문해서 같은 운명의 사기장들을 만났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험 가마를 만들어 화염 속에서 생겨나는 흙의 변화를 탐구하며 쌓인 회포를 풀었다. 구로카이야마에 올라 조선사기장들이 갇혀있는 ‘오코우치’ 사역장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영오의 신세로 혹사당하는 그들을 생각하며 눈물도 지었을 것이다.

▲ 1616년은 일본의 자기 원년
그러나 장인은 어디서나 장인이다. 슬픔도 기쁨도 천직을 능가하지 못한다. 이삼평은 다시 발길을 돌려 백토를 찾아 나섰다. ‘아리타’ 동쪽 연봉을 헤맸다. 행운의 여신은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밑의 능선이 온통 자광이 아닌가.

그는 까무러지듯 놀랬다. 함께 따라나선 사기장들도 사방을 확인했다. 능선 모두가 자광이었다. 조선 사기장들에게 행운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일본 문명사의 새장이 열렸으니 이때가 1616년. 이삼평이 ‘다쿠’를 떠난 지 2년만의 일이다. 그의 나이 38세 때 일이다.

무진장의 백토를 얻은 이삼평은 다시 나베시마의 명령에 따라 자광 이즈미야마 이웃에 있는 ‘덴구다니’에 본격적인 조선등요를 구축, 일본 최초의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일본 역사는 이삼평이 자광을 발견한 1616년을 일본의 자기원년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일본 도자기문화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학자 중에는 이삼평이 계룡산 근처에서 도기를 굽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에 관해선 문외한이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 사기에 익숙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이는 우리 도자기사를 왜곡하는 말이다. 이삼평의 ‘아리타야키’는 백자를 말한다.

거기에 문양이 입혀져 일본의 청화백자가 되었고 ‘경덕진’을 모방하여 ‘아카에’가 되어 안료와 기법의 발전은 오늘의 수려한 ‘아리타야키’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은 백자다. 생각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하얀 캔버스를 이삼평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초기 백자는 신라 말기에 이미 생산되었다. 고려에서도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백자가 생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약이 밀착한 순백의 우수한 백자를 생산한 것이다. 세종대로부터 연산군대에도 그것이 있었다.

자기는 백토를 사용해서 비로소 정밀하게 번조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고령의 자기가 우수했으나 이것도 광주 자기에는 미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우수한 순백의 백자가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기장들이 백자번에 익숙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이 간다.

이삼평이 자신의 직업을 묻는 나베시마의 질문에 “나는 사기장입니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조선시대는 도공을 ‘사기장’이라 했다. 근세에 이르러 자기장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초기에는 구별 없이 혼용했다. 이삼평도 시대의 흐름에 등을 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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