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1980년 이후 한국의 매체광고 시장은 괄목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경제적인 궁핍과 정치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지고지순한 지사형 언론인이 되겠다는 청년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충원을 염두에 둔 사람들도 언론고시에 도전했다. 사법·행정·외무 고시 이상의 경쟁률이 형성되었다. 고시 3과에 합격한 사람들 중의 일부가 관복을 벗고 정치적으로 충원됐던 것처럼 언론고시에 합격한 언론인들의 상당수가 펜을 놓고 여의도 정치권에 입성했다.
고시 출신의 전직 벼슬아치들과 언론고시를 거친 전직 언론인들이 국회의원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수학능력시험의 성적이 한 인간의 나머지 전체 삶을 일회적으로 판별해 버릴 수 있는, 가히 수능마저 수능 고시(考試)가 돼 버릴 수 있는 나라에서 여의도 국회의원 시장이 갖가지 ‘고시’ 출신들로 들끓는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한편 언론 시장에는 다른 이름의 고시가 신기루처럼 번져 있다. 이른바 ‘신문고시’ (新聞告示). 원래 이름은 ‘신문업에 있어서의 불공정거래행위의 유형 및 기준’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체로 신문 산업은 위축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광고매출액 역시 감소돼 왔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우리의 경우 신문 산업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신문독자가 감소하면서 신문시장의 크기 자체가 작아지고 있는데 신문사업자의 숫자는 그대로이다. 자연스럽게 신문사업자들끼리 서로 상대방의 독자를 빼앗아오려는 목불인견의 무한경쟁 체제가 심화되었다.
판매자금의 여력이 있는 신문들은 선풍기와 자전거로 상대 신문의 독자를 유인하였다. 빼앗긴 독자를 탈환하기 위해 다른 신문은 그러한 상품들에다가 실제 상품권을 얹혔다. 고만고만하게 유사한 신문들을 번갈아 구독해주면서 영악한 독자들은 선풍기를 받고 자전거를 취하고 상품권을 챙겼다.
토마스 제퍼스이라는 미국의 대통령은 신문이 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을 해서 유명해졌지만 한국에서는 보던 신문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신문시장은 급속히 소수의 과점지배체제로 재편돼 갔다. 급기야 1990년대 중반, 수도권의 한 지역에서는 큰 신문의 판매를 담당하는 지국원들끼리 사람을 살상한 칼부림을 벌였다. 그 시점에서 신문시장의 불공정 거래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편으로 ‘신문고시’가 제정되었다.
제정 시행된 직후 폐지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1년 회생했다. 그나마 ‘신문고시’를 없애버리겠다는 정부당국자들의 견해가 간간히 들리는 가운데 병든 닭 마냥 허약한 신문고시의 숨이 아직까진 붙어 있긴 하다.
최근 방송광고 분야의 미디어렙과 관련해 1공영 다민영 안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코바코, 즉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독점적으로 판매를 대행해 오던 지상파방송광고시장의 구조를 여러 개 사업자가 경쟁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방송광고를 유치하기 위한 방송사업자들의 시청률경쟁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걷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도 서울의 큰 방송사들로 방송광고가 집중돼 지역방송사들의 고충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3개 혹은 그 이상의 미디어렙이 경쟁적으로 방송광고를 판매할 경우, 신문시장의 공정거래 회복을 위해 신문고시를 만들었던 것처럼 방송광고 시장의 공정거래를 위하여 ‘방송고시’ (放送告示) 제정이 불가피할지 모른다. 언론고시, 신문고시, 방송고시. 가히 고시 (考試), 고시 (告示)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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