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짐승남이 대세라 한다. 탄탄한 가슴과 빨래판 초코 배근육에 마초 냄새를 풍기는 대표 짐승남에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욘사마 배용준을 뽑았다. 섬세한 취향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토이남, 여성에게 빌붙어 사는 애완남, 김밥의 우엉처럼 비실해 모성애를 자극하는 우엉남을 제치고 지금은 짐승남이 선호되는 시점이다.
난세나 불황에는 거칠고 센 남자가 뜨는 현상일지, 하여튼 성적인 의미가 붙거나 말거나 당사자들은 기분 좋아한다. 이미 결혼한 품절녀와 품절남이 그랬고 한창 논란이 뜨거운 `꿀벅지'도 그렇다. 반응은 이럴 때 대강 두 가지다. 이번에도 허벅지가 꿀처럼 달다는 성적 맥락에서 천안 여고생의 사용금지 청원이 있었고, 비판적 문제 제기의 다른 편에 “꿀벅지 어떻게 만드나요?”라는 문의가 빗발친다. 허벅지 여신들이 분에 겨워하는 `꿀벅지'에는 성적 모티브가 담겨 있다.
우리가 일말의 미안한 마음 없이 쓰는 `섹시'는 도저히 섹스의 실제 의미와 분리가 안 된다. 냉철한 머리는 지적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바라보지만 내 가슴은 육감적인 제시카 알바를 향한다. 그녀들은 곧 늙고 잊혀진다. 신조어사전의 어휘 대부분은 죽어 있다. 찰벅지·꿀벅지도 `폭풍 각선미'도 머잖아 생명력을 소실하고 만다.
몸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문. 지각(知覺)의 상투성에 너무 사로잡히면 본질을 직시 못하는 수가 있다.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하루 수십 번 질겅질겅 곱씹으며 사는 수밖에. 비하와 희롱이 아닌 칭찬의 대상이 되는 성 이미지는 자본주의의 고급 상품이다. 그래서 몸의 언어도 언어라며 피땀 흘리고 돈 들이며, 얼마간은 설탕 넣은 꿀 말고 `유기농 꿀벅지'라도 갈망하는지 모른다.
질퍽한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인 몸. “꿀벅지는 나를 만든 단어다. 고맙다. 기분 나쁘지 않다.” 매끈한 허벅지로 주가가 치솟은 유이의 당당한 말을 듣고 순간 나는 무릎을 친다. 형용사 `유이하다'가 생각난 것이다. `유이'는 `살찌고 기름기 돌아 번지르르함'이니, 허벅지가 유이한 유이? 가수의 예명에 실어본 소소한 언어유희다.
`맛있다', `성(性)', 뭐 이런 쪽으로만 자가발전하지 않는다면 꿀은 그저 달콤함이다. 그러나 꿀은 달아도 벌은 쏜다. 아니, 벌은 쏘아도 꿀은 달다(=어려움이 지나면 이로운 것도 있다)고 해야겠다. 꿀주머니, 꿀단지, 꿀잠, 이제 꿀맛 같은 꿀연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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