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엉뚱하게도 70이 넘는 나이에 통영에 식당을 개업해 승승장구하는 대한민국의 여장부 그레이스 리의 자서전이 오늘 소개할 책이다.
▲ 오늘이 내 삶의 클라이맥스다 |
세 아이가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신경이 쇠약해져 이경자씨는 수면제 다량복용으로 자살기도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갔다가 결국 34살의 나이에 이혼한다. 언젠가는 꼭 세 아이를 다시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영어라고는 Yes, No 두 단어만 아는 상황에서 미국으로 혈혈단신 떠난다.
그는 선배의 권유로 미용 일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당시 뉴욕의 가장 유명한 미용 전문학교인 윌프레드 아카데미로 진학한다.
영어라곤 Yes와 No밖에 모르는 그가 모발의 구조와 단백질의 특성, 얼굴뼈의 생김새 등을 가르치는 미용 기초 이론 수업 과정을 1년 안에 통과해야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세 아이의 엄마였던 이경자에게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한다면 영영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냈고 몇 개월간 거의 밤샘을 하는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자격증을 따낸다. 그리고 뉴욕 미용계의 전설과도 같았던 헨리 벤델 미용실에 취직하여 주목받는 헤어드레서로 성장하고 5년 뒤 귀국, 마침내 원하던 세 아이와 재회하며 그토록 꿈꾸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연출해간다.
미용계의 해외유학파 1호로 통하며 당시 폴 미첼과 비달 사순의 섹션분할 커팅 방식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면서 세련된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켰고, 1976년 한국 미용인으로는 최초로 <보그>지에 소개되었고, 1979년에는 아일랜드 국제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용부문 금메달을 따는데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받는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다가 70세의 그녀에게 유방암이라는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암에 걸리고도 그녀는 담담했다.
‘지난 70년동안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술도 좋은것만 마시고, 여행도 원도 없이 해봤지. 그리고 착한 세 아이들이랑 손주들 덕분에 행복했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물론, 수술도 받을 것이고, 항암 치료는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 비관적이거나 억울한 마음은 아니다. 앞으로 더 산다면 그건 덤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암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그녀는 제 3의 인생을 산다.
그는 느닷없이 발병한 유방암을 담담히 이겨내고 무려 일흔 두 살이라는 나이에 “미용사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요리사”를 하기 위해 경남 통영에 ‘중국요리 이선생’이라는 음식점을 열었고, 지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통영에서 그녀 특유의 마케팅 능력으로 통영 최고의 음식점 자리매김한다.
“밥은 밥맛이 나야 밥이다.”고 강조하는 그의 음식론은 일견 평범한듯 보이지만 쉽지 않다.
그의 식도락은 70년 세월을 지나왔다.
어릴 적부터 미식가였던 부친을 따라 ‘맛있는 음식점’을 순례했단다.
일흔이 된 2001년 그녀는 연대 어학당에 등록했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그였지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음식을 제대로 주문하기 위해서 공부했죠. 벽마다 중국어를 써 붙여 외웠지요.”그런 인연으로 중식당까지 냈다.
그레이스 리는 삶에 대한 놀라운 에너지로 불행한 자신의 삶을 매력적인 삶으로 바꾸는 감동을 안겨주었는가 하면, 여성이 세상의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시대, 스스로 무대를 꾸미고 주연으로 여성의 멘토가 되어주었고 미용인을 경시했던 시대 새로운 롤모델이 되어 미용인의 자존심을 높여주었으며 모두가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인생에 도전함으로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암과 담대하게 싸우며 여전히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살아내고 있다. 그 모든 기적은 삶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사랑한 그의 열정이 만들어냈다.
‘77세. 그레이스 리는 지금 행운의 숫자가 두 번이나 겹치는 딱 좋은 나이라며 생애 두 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왜 그가 ‘오늘이 내 삶이 클라이맥스’라고 말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도 필요한 희망이며 열정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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