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학교의 교정을 걷거나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며 나뭇잎의 변화에 시선을 멈추기도 하고 이른 아침 선사유적지 언덕에서 새벽안개와 함께 연출하는 건물사이의 일출 풍경들을 마주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기도 한다.
온 산이 붉게 물들어 다가서면 보는 이의 몸과 마음에도 붉은 물감이 스며들 것 같은 중국의 산수화가 이가염의 “만산홍편”(萬山紅遍)이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지난 가을 몇몇의 화우들과 찾은 금산의 원골풍경과 영국사 은행나무의 황금빛은 화심(畵心)을 돋우기에 충분한 작품의 소재였는데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보기도 하며 1차적으로 대상의 느낌, 즉 전체적인 풍경의 분위기인 화경(畵境)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2차적으로 화지를 펼쳐 대상을 옮겨내는 작업을 통해 영국사 은행나무와 원골의 가을 이라는 현장 사생 작품을 제작 해 보면서 가을의 빛과 색을 담아 보려한 기억을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생명의 변화를 화가의 마음에 품어 그림으로 담아내는 것이 한국화에서 산수화(山水畵)라 할 수 있다.
산수화는 대상으로 포착된 자연경물을 정지된 시각, 정지된 색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움직이는 시각으로 파악되며 주변을 걸어보며 대상을 둘러싼 공간적 이미지를 변화하는 색채로 자연의 형상을 빌려 산수의 생명을 담아내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화가의 마음속에 그려진 1차적 심화(心畵,작가의 마음속에 그려진 작품구상도)는 일정한 장소를 선택하여 화가에 따라 간략하게 또는 세밀하게 스케치를 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준비된 화지위에 심화된 산수풍경을 담아내기도 한다. 현장의 느낌을 중시하는 산수화가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작품을 완성하기도하며 산수화 재료(문방사우화선지, 먹, 모필, 벼루)의 정신성을 더욱 중시하는 화가들은 관찰과 체험을 통해 경험한 산수자연의 심화내용을 2차적으로 화가의 형상기억에 의해 작업실 공간에서 펼쳐내기도 한다.
동양의 화가들이 특히 산수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에는 산수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정신적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지순임 교수의 산수화의 이해 라는 책에서 “동양인은 산수를 우주의 근본이자 인체처럼 살아 꿈틀대는 생명체로 생각하여 산의 바위를 천지자연의 뼈로, 물을 천지자연의 핏줄로, 나무와 풀은 천지자연의 머리털로, 그리고 구름과 안개는 천지자연의 입김으로 마치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비유”하여 생각하고 관찰과 작화를 통해 화가와 감상자의 수양적 대상으로 인식 하여 지난 천년의 시간 속에서 동양회화의 주류를 형성 해 오고 있다고 보여 진다.
이처럼 산수화는 화가나 감상자의 수양적 측면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르게 나타나며 산수체험의 경험이 실내의 장식적 공간에 들어와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또 다른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회화의 중심에 위치했던 산수화가 최근 들어 다소 위축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인간, 삶의 공간 변화와 함께 급격한 산업화, 거대 도시화에 따른 자연과의 교감이 산수화가 풍성하였던 시기처럼 일상적 요소에서 멀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화의 내부적 요인으로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산수화는 오늘, 우리 산수화가 무엇을 마음에 담아 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짧은 경험만으로는 산수화의 주재료인 먹墨과 화선지, 그리고 붓筆은 독특한 미술재료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또는, 신앙처럼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과 아직도 일부에서 그렇듯 스승의 체본(體本,그림의 표현방법과 내용들을 그려주고 모사하는 방법)이 교과서가 되어 전수되는 교육방식은 탈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산수화는 자연의 구성요소들이 그러하듯이 가장 자연스러움 속에서 자유롭게 화가의 개성적 창작세계가 표출되는 것으로 오늘, 이 시대에 한국의 산수화가 다양성을 바탕으로 좀 더 높고 넓은, 푸른 가을 하늘에 색다름으로 또 다시 펼쳐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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