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이삼평과 심수관... 日도요 양대산맥 이뤄

닮은 듯 다른 이삼평과 심수관... 日도요 양대산맥 이뤄

<일본도요산책> 12. 李參平과 아리타 窯

  • 승인 2009-09-21 19:37
  • 신문게재 2009-09-22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한, 중, 일 한자문화권 가운데서 유별나게 도자기에 집념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일 것이다. 임진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까닭도 그런데 있다. 임란 당시 왜군은 조선도공 400여명을 세 척의 군선에 싣고 퇴각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두 척은 ‘북규슈(나베지마 領)’에 떨구고 나머지 한 척 40여명 만이 가고지마(鹿兒島)에 표착을 했다.

그것이 두 영주 간의 묵계였는지 아니면 풍랑으로 통제가 불가능했는지 그 까닭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사츠마’의 14대손 沈수관씨도 그 점이 아리송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든 그 바람에 ‘사츠마’와 ‘아리타’는 일본 도요의 양대 축으로 성장 번영을 거듭해왔다.

▲ 이삼평이 신으로 모셔져 있는 아리타지역의 도산신사 전경.
▲ 이삼평이 신으로 모셔져 있는 아리타지역의 도산신사 전경.
도자기를 신앙처럼 떠받들어 온 일인들은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권위를, 또 한편으로는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 전국시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마무리 짓고 다도(茶道)를 확립시킨 게 도요토미(豊臣秀吉)라고 흔히 말한다. 어떻든 조선도공에 의해 일본도요(陶窯)는 빛을 발했고 오늘날 세계 제일의 도요국(陶窯國)으로 발돋음 했다. 그들의 도자기 선호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예를 들어보자.

임진란을 전후해서 고려청자나 분청사기, 백자 같은 자기를 보면 영주(大名)나 대상(大商)들은 일개 성(城)과 천만금을 내놓으며 맞바꾸려 했다. 하지만 그 무렵 평민들은 표주박과 대나무마디를 잘라 밥그릇으로 대용했다. 오늘날 일인들은 잘산다고 뽐내지만 지금도 도자기라면 눈빛이 금방 달라진다. 오사카(大阪)에서 5대째 이조 청와백자를 모으는 집 ‘리세이도’ 주인은 ‘청와백자사면병’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태양아래 노출시켜서도 안 되고 함부로 내보이는 일 자체도 금기시 한다. 그 도자기를 한 번 보는데 우리 돈으로 100만원을 줘야 한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다. 이쯤 되면 일인들의 도자기 선호도는 가히 광적이라 할 수 있다.

▲ 조선도공을 신격화하는 이유
이삼평(李參平)은 조선출신 도공으로 아리타 자기 또는 이마리 자기의 모태를 이룬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명은 가네가에 산베에(金ヶ江 三兵衛)이다. 나중에는 가키우에몽(枾右衛門)이라 불렀다. 충청도 금강(공주시 반포면) 출신으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일본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잡혀 일본에 끌려 온 도공들 중 한 명이다.

이후 이삼평은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아울러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는 이삼평은 가네가에 가문의 문서에선 이 씨라는 기록과 산베에라는 이름이 삼평(參平) 혹은 삼평(三平)으로 기록된데 연유한다.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에 의탁하면서, 오기 군 다쿠에 살았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삼평은 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기 위해 나베시마 가문의 영지인 사가 번내를 전전했고, 마침내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천산(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곤 덴구다니에 가마를 설치, 일본 첫 백자를 구워냈다. 이로서 아리타 자기가 발원한 것이다.

아리타의 류센지(龍泉寺) 장부엔 1655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명은 월창정심거사(月窓?心居士)였다. 이참평의 묘소는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1959년 덴구다니 가마 부근에서 묘석의 하부 부분이 발견되어 시로카와 묘지에 옮겨졌다. 안타깝게도 묘석 상부 부분은 찾지 못했다. 이 묘석은〈이삼평의 묘〉로서 아리타 정(町) 사적에 등재되어 있다.

이삼평은 아리타 지역에서는 도자의 시조라 해서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에서는 이삼평은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신으로 모셔져 제를 지내고 있다. 1917년 아리타 자기 창업 300주년을 기념하여 도잔 신사에〈도조 이삼평 비〉가 건립되었다. 매년 5월 4일 도조 축제가 열린다.

또 1990년에는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합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리타 자기 발양에 관한 조사에서 1610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 이미 자기생산이 시작되었고, 그 밖의 자료 등으로 볼 때, 오늘날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문시되는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아리타 자기의 탄생과 발전에는 이삼평을 비롯 많은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아리타와 이마리의 번영시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선 도공(陶工)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의하여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그에 의해서 시작된 가라쓰 도자기이다.

그 뒤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이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을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다. 이삼평은 일행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주, 도향(陶鄕)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30여년 후 이곳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다.

▲ 1917년 아리타자기 창업 300주년을 기념해 도산신사에 세워진 이삼평의 비.
▲ 1917년 아리타자기 창업 300주년을 기념해 도산신사에 세워진 이삼평의 비.
이때까지 아리타는 심산궁곡으로 1590년대의 지도에는 전혀 지명이 나와 있지 않던 곳이었으나 1680년대 지도에선 아리타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이삼평과 함께 납치되었던 도공의 수는 155명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리타명산(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획득 대도향(大陶鄕)으로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에도(江戶)후기에 이르러 이 아리타 이마리 도자기는 일본 여러 지방의 자기 중 단연 제일로 발전되며 이마리항(港)을 통하여 널리 수출되었다. 아리타도자기의 특징은 아리타 내산제요(內山諸窯)와 외산제요(外山諸窯)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내산의 제요는 이삼평이 발견한 백자광 이스미산의 도석(陶石)과 시라카와산(白川山)의 유석(釉石)이 보존되어 있었고, 이삼평의 지휘하에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주문에 의한 상등품의 제작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주로 개물류(蓋物類), 도발극상(兜鉢極上)의 침향호류(沈香壺類), 회석상(會席床)의 식기류, 세공(細工)의 향로류(香爐類) 등이 제작되었다. 초기 이마리는 단순한 조선식 백자이며, 고(古) 이마리는 아리타 백자로 바뀐 일본 최초의 백자였다.

또, 아리타 외산제요는 지주나 상인들의 일상 식기류를 주로 구웠고, 제품의 대부분은 청자·청화백자·백자 등으로 서민적이며, 대발류(大鉢類)로부터 유합(油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 것으로 자유분방한 작품의 초문(草文) 등의 그림이 많다.

▲ 사츠마 요엔 조선의 혼이
메이지(明治)이후의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기계화와 근대화 기법으로 발전해왔으며 현재 대소 백수십개의 가마가 설치되어 최대의 도향으로 활발한 발전을 거듭해가고 있다. 도조(陶祖)이삼평의 기념비는 아리타 마을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의 뒷산에 위치하여 아리타도업(有田陶業)의 장래를 지켜보고 있다.

도자기의 고장 아리타(有田)는 일본 문화의 이런 특징을 잘 살려 놓은 도시라 할 수 있다. 아리타는 요시노가리 유적이 있는 사가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전동차를 타면 30~40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이곳은 오지가 되어 후쿠오카에서 이 마을로 가려면 전동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아리타는 우선 우리나라 도공이었던 이삼평(李參平)이 만든 마을이라는데 관심을 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와 일본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운 우리나라 인물들이 많다. 이중에서도 심당길(沈堂吉)과 이참평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서 심당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후손들 역시 한국을 자주 찾는데 반해 이삼평은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 따라서 일본에서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오는 사람들도 이삼평이 도자기문화를 꽃피웠던 아리타 보다는 심당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미야마(美山)를 많이 찾는 경향이다.

이것은 아마 심당길의 후손인 심수관(沈壽官)이 운영하는 미야마 요에는 아직 한국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는데 반해 아리타 요에서는 한국의 흔적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정답게 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정원수가 잘 가꾸어져 있는 수관도원에는 무궁화 꽃이 피어 있고 별채에는 우리나라 정부가 수여한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관이라고 쓴 청동으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아리타에서는 이런 것들을 찾아 볼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에 많이 잡혀 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리타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이참평 역시 이때 일본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도공들이 규슈에 온 것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정유재란이 막바지에 1597년 임진왜란 때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는 규슈 사쯔마의 제18대 번주(藩主)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다시 조선으로 와 이듬해인 1598년 퇴각하면서 조선도공 80여명을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이중 40여명은 나고야 성이 있는 북규슈 사가현 가라쯔(唐津) 해안에 도착해 사가(佐賀)와 나가사키(長崎), 구마모토(熊本)로 흩어져 정착했고 나머지 40여명은 시마즈를 따라 남규슈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리타는 조선인에 의해 처음으로 백자가 생산된 곳으로 일본인들은 믿고 있다.

더욱 이 마을은 이삼평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40~50년 밖에 되지 않은 1650년대부터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많은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참평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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