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창곤 프랑스문화원장 |
역(驛)이 많은 사람에게 희망에 찬 떠남, 아니면 단조롭기만 한 일상을 변경하는 최초의 시도일 수 있다면, 이들의 역은 이 기본적인 기능을 상실한 그저 “머무르는 곳”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아마도 출신국가별로 형성된 듯한, 이들의 삼삼오오 대열도, 이러한 정지(停止)의 느낌을 강조하는 듯 했다. 단지 점차 차가워지는 새벽공기가 때때로 지르는 이들의 이해 못할 문장들만이 새벽의 정적을 가르고 있는 9월의 청명한 아침이었다.
이날 오랫동안 그들과 같은 이방인의 위치로 지냈던 프랑스에서 즐겨들었던 미쉘 베르제의 샹송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을 위한 노래(Chanter pour ceux qui sont loin de chez eux)”가 하루 종일 나의 머리에 맴돌았던 것은, 이들의 눈빛에서 얼마 전까지는 나의 것이기도 했을 두려움과 앞날의 불확실성에 대한 짙은 염려를 느꼈기 때문이다. 해서 이주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의 어린 신부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분노는, 교양인들의 공분(公憤)을 넘어 좀 더 개인적인 경험에 뿌리를 둔 생리적인 반발인 셈이다.
한편에서 젊은이들의 심각한 구직난을 우려하고, 또 한편에서는 태반이 이주노동자들의 땀으로 유지되는 산업들이 점차 늘어나는 모순을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이들이 임시방편의 노동력이 아닌 우리사회의 엄연한 성원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수많은 3D산업의 주 근무자가 이들이고, 충남 농촌지역 신혼부부의 반 이상이 이국에서 “공수”된 어린 신부들로 이루어진다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가진 자들이 던져주는 값싼 인도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안정을 위해 하루 빨리 취해 할 이기적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식민지 통치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인종끼리의 공생이 한 세기를 넘고, 우리 보다 30년이나 먼저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였던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이들에 대한 사회, 경제적 냉대가 대규모 폭동사태로 까지 번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지구상에서 아마도 가장 혹독한 인종차별국가중의 하나일 우리의 변화는 어쩌면 “선택”을 넘어 미래의 사회적 안정을 위한 “의무”에 속할 시급한 일인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오히려 간단할 수도 있다. 3, 40년 전, 몇 장의 달러를 벌기 위해 머나먼 독일의 광산으로, 야간 병동으로 떠났던 우리 선배들의 외로움을 상기한다면, 허허벌판의 사막에서 오로지 조국의 가족을 생각해 살인적인 태양과 모래밥을 감내했던 중동 근로자들의 절박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들에 대한 우월적 시선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대표어로 지칭되는 떼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뒤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애틋한 고향이 존재하는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나 외국인 신부라는 지칭대신에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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