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임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악장 |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성격상 모남을 둥글게 만들어가고 배려와 용서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전 대통령도 죽음앞에서 “ 누구도 탓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 아니겠는가? ” 또 김대중 전 대통령 경우도 “ 화해와 용서 그리고 상생과 협력” 등의 단어들이 화두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죽음과 삶이라는 것은 일정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진대 왜 우리의 삶들이 이렇게 복잡하고 각박한가? 하는 반성과 더불어 제게 주어진 일과 제 삶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만족해야 한다는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저의 삶에서도 자주 타인과의 이견이 있었고 소위 좋은 말로 소통의 문제로 고민한바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지금에도 그런 것을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저분은 참 훌륭했어... 저분은 참 독한사람이야... 결국 저렇게 갈것인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좀 잘하지” 등 반대편에서 보면 이것이 나에 대한 사후의 평가이고 이야기가 될 것을 간과하고 있었나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소통이 중요한 모양입니다. 타인과의 대화. 소통이란 것이 나라는 존재를 내려놓고 눈높이를 맞추는 작업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모를리 없건만, 왜 이 실천이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달 저도 휴가를 했습니다. 헌데 휴가라는 단어와 걸맞지 않게 오히려 안밖으로 할 일이 더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불만도 있었지만 죽음이란 화두와 연계해 좀더 깊히 생각해 보니 이 또한 나로 인한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면에서는 오히려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또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일을 하고 싶어도, 참여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건강해서 감사하고, 소중한 가족이 있어 감사하고, 일 할수 있어 감사하고, 나를 필요로 해주니 감사하고...문득 이런 생각에서 잠시 옹졸한 생각에 머물렀던 스스로에 대해 미안함이 스쳐갑니다.
서울역을 지날 때 마다 노숙자를 보게 됩니다. 오죽하면 그 분들이 그런 생활을 하겠습니까? 다시 한번 “일” 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소중함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울면서 태어나 불평하며 살다가 후회하며 죽어간다는 삶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처럼 정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만 우리는 주어진 일에 진정 감사하며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세상 살고 있는 우리들중에서 아무 목적이나 희망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나름의 존재의 의미가 필연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가야합니다. 아마도 최근의 죽음들을 보면서 우리 모두 이런 배움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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